누가복음24:13-35 "부활하신 왕께서 엠마오로 향하시다"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2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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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남제일 작성일24-04-06 17:50 조회18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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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주일예배
#shorts설교 오창우 목사 그리스도의 삼중직이 기준되는 삶
240407 가스펠프로젝트신약3-7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부활하신 왕께서 엠마오로 향하시다”(눅24:13-35)
오늘은 성도가 어떻게 해야 불행한 신앙생활을 버리고 행복하고 기쁜 신앙생활로 변화될 수 있을까?에 대한 말씀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굉장히 불행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누가는 이런 분들이 있었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슬픈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이것은 당시 교회 공동체뿐 아니라 지금 우리들 사이에도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이 두 명의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부활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반대로 가고 있다. 그 상황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시는 충격적인 말씀이 있다.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17,25)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 있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이 매우 기뻐야 하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더디 믿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더디 믿다! 선지자의 말을 여기에 연결 되서 예수님의 부활까지도 듣고도 더디 믿으니까 그 나타난 현상을 슬픈 빛을 띠고 예수 제자 공동체를 떠나가는 것이다. 말씀이나 부활의 소식은 알겠는데 믿어지지 않아서 슬픈 신자들이다. 이것은 굉장히 불행한 신앙생활이다. 부활의 예수님이 찾아오셨고 함께 하시지만 영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1) 영적으로 보지 못했다.“저희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6) 2) 영적으로 듣지 못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 3) 영적으로 느끼지 못했다. 주님이 친히 자신을 보여 주셔도 말씀을 하셔도 느낌까지 없다. 여러분은 어떤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영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하심으로 기쁘고 활기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슬픈 빛을 띠고 정착하지 못하고 그 동안 쌓아왔던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내 버리고 떠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영의 눈이 열려지고 말씀이 믿어지는 행복한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가지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영의 눈이 뜨여 지고 말씀이 믿어지기 위해서는
첫째, 사모해야 한다.
잠언 8:17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하셨다. 영의 눈이 가리어지는 것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여러분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있는가? 영성가인 필립 얀시가‘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책을 썼다. 어느 날 자신의 영적상태를 보니까 하나님이 없더라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그림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성찬이 있다. 처음 그림에는 예수님께서 잔을 드셨다고 한다.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 주었더니 하는 말이 예수님께서 손에 금잔이 너무 멋있다고 평을 했다고 한다. 놀란 미켈란젤로는 예수님 그림에 예수님이 돋보여야지 금잔이라니 하고는 금잔을 없애고 지금처럼 상에 손을 대고 계신 그림을 그려서 예수님만 돋보이게 그렸다고 한다. 우리의 영적상태는 어떤가? 예수님보다 하고 있는 일이 바빠서 친구들과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는 것에 유행을 따라 사는 것에 빠져서 예수님을 놓치고 살고 있는 지는 아닌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부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나 여인들이 전하는 말을 들을 것보다는 자신들의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주님이 찾아오셔도 몰랐다. 다시 말하면, “부활! 그런 일은 들어본 일이 없어!”믿지 않았던 것이다. 선지자의 말씀도 더디 믿었다고 하지 않는가? 극히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주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오셔도 모른다. 사모하지 않는 자에게는 주님의 모습이 보여 지지도 않고 주님의 하시는 말씀도 들려지지 않고 가슴으로도 느껴지지 않게 되는 영적무감각 상태가 되는 것이다. 주님이 오실 때는 도적같이 아무도 모르게 오신다고 하셨는데 재림 예수께서 오실 때에 맞이할 등불은 준비되고 있는가?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라고 기도했다. 욥은 나중에 은혜를 받고 나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13:16) 같은 성경인 누가복음 2:에 시므온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즉시 하나님을 찬양했다. 아기 예수님이 부모님과 함께 정결예식을 위하여 성전을 찾았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보고 즉시 알아 보았다.“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 간절히 사모했던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한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30-32) 사모하고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는 자가 비록 아기라고 할 지라도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한 청년이 찾아왔다. “저도 선생님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을 하고 공부를 해도, 선생님과 같이 말과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했다. 소크라테스는 청년을 데리고 강가로 가서 깊은 물에 들어가 숨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나오라고 했다. 물속에 들러가 한 참을 있던 청년이 나와서 깊은 숨을 쉬었다. “자네가 물에서 나올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공기, 숨을 쉴 수 있는 공기입니다.”“지금 이 간절함을 잊지 말게. 방금 숨을 쉬고 싶어 했던 만큼 평소에 자녀가 지혜를 원한다면 반드시 얻을 것이네.”그렇다.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하나님을 만난다. 교인 중에는 집안의 좋은 일, 굳은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다고 헌금도 하고 때로는 교인들과 떡을 나누는 분도 있다. 지난 주일에는 다음세대들에게 용돈을 주신 집사님도 계셨다. 어느 집사님가정은 부활절 헌금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생각지 않았던 보험금이 나와 헌금할 수 있음을 감사한다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함께 하심을 가슴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영적인 축복은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사모하는 신앙에 주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다.
영의 눈이 뜨여 지고 말씀이 믿어지기 위해서는
둘째, 예수 중심으로 말씀을 봐야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구속의 역사가 그리스도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이처럼 성경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10:35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시면서 말씀 즉 예수님을 증언하는 말씀을 가진 자는 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영적인 존재로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에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 중에 성경과목이 있다. 성경의 첫 문제가 바로 “성경을 요약하시오!”였다. 답은 “구약은 오실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고 신약은 오신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다.”예수님이 성경의 중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할 것을 신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가르치시는 것이다. 우리도 지금 가스펠 프로젝트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것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읽기의 하나이다. 예수가 그리스이심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읽을 때, 왜 그리스도가 필요한가? 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죄인이요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도 알 수 있다. 성령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룩한 존재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만 칭의, 성화, 영광이라는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었고 과거, 현재, 미래가 그리스도로 이어졌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경을 읽고 믿을 때만 행복할 수 있다.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면으로 성경을 읽으면 이해 할 수 없다. 오히려 불신과 불행만 있을 뿐이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불행한 신앙생활도 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지 않아서이다. 예수님에 관해 몰라서가 아니다.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반문한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나사렛 예수의 일을 모르시냐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예수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라고만 했다. 예수가 선지자 일뿐,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대제사장과 관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 십자가에 힘없이 죽은 예수라고 생각하여 실망해서 떠난 것이다.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하고 구원할 자라고 믿고 바랐는데 십자가에 죽은 것은 실패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또 하나의 소식, ‘이 사람이 십자가에 죽은 지 사흘째인데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역시 황당한 이야기로 들리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으로 성경을 읽지 않으니까 슬픈 빛을 띠고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제자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셨다. 25절에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하시고는 모세와 선지자의 들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이 예수님 자신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미련하다’는 책망은 멍청하다는 경멸의 표현이 아니라, ‘생각과 이해가 부족하다’는 평가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지자를 통해 너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말씀대로라면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신 것으로 성경을 강해 하셨다. 어느 덧,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려고 했던 마을에 도착했다. 시간도 저녁이 되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그냥 보내실 수 없어서 자신들과 함께 밤을 지내자고 강권했다. 매우 잘한 일이다. 강권하지 않았다면 아마 주님께서 그대로 지나가셨을 것이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편에서 내리는 결단을 전혀 무시해버리지 않으신다. 주님을 진정으로 모셔 들일 때, 3가지 일이 벌어졌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시면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셨다. 그리고 떡을 떼어 주실 때 받아먹는 제자들의 영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두 번째는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 번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증거 했다. 완전 변화되었다. 불행한 신앙생활이 기쁨의 신앙 생활할 수 있게 일어난 영적변화이다. 벤허라는 유명한 영화가 만들어 진 것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비슷하다. 벤허의 저자 루 윌리스는 예수를 믿었고 교회를 다녔지만 무신론자에게 기독교를 반박할 수 없었다. 벤허를 쓰게 된 이유에 대하여 “나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저는 하나님, 천국 내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무지함이 부끄러웠으며, 이 모든 주제에 대해 연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예수의 생명이 약동하고 흘려가게 된다. 성경을 읽었어도 성경을 예수의 증거로서 읽지 않으면 예수께로 나오지 않고 나올 수도 없다. 그러나 예수를 고려하며 성경을 읽으면 성경의 맥이 잡힌다. 성경을 올바르게 읽으면 예수라는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벤허는 기독교에 대한 단순 소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의 삶에 사로잡혀 회심하는 순간들 속에서 집필한 것이다. 국민일보 겨자씨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구순을 맞은 권사님의 변화이다. 몇 년 동안 수술을 많이 해서 그러신지 만날 때마다“목사님, 오만 군데가 다 아파요” 했다. 그런데 지난 연말 집안 어른과 통화하다가 그분이 1년에 성경을 세 번 정도 통독한다는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나도 못 할 게 없겠다’ 해서 새해부터 마음먹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어렵게 만 느껴지던 성경이 읽어지더란다. 특히 구약성경이 너무 재밌어서 읽고 또 읽었다. 구약성경을 통독하니 신약은 거저먹기로 읽어지고 이해가 된다고 하셨다. 성경을 읽는 재미가 너무 좋아서 외출도 자제하고 아픈 것도 잊고 날마다 말씀 속에 거하는 재미를 누리면서 산다고 말씀하셨다. 3월인데 벌써 신구약을 한 차례 통독하셨다. 현재 신약 마지막 부분까지 왔으니 곧 두 번째 통독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한다. 말씀을 예수님 중심으로 읽을 때, 주안에 살아가는 인생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베드로후서 3:18에서 베드로 사도는“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예수 중심으로 읽음으로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축복된 삶이 살아야 한다.
그렇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불행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찾아오신다.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 중심의 말씀으로 행복한 신앙생활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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