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20:19-23 "부활하신 왕께서 자기 사람들을 보내시다" 한남제일교회 고노아목사 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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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남제일 작성일24-04-13 18:45 조회25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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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가스펠프로젝트신약3-8 한남제일교회 고노아목사
“부활하신 왕께서 자기 사람들을 보내시다”(요20:19-23)
오늘은 세상의 모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주님의 평안 가운데 거하게 하시는 말씀을 주신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대로 나타나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 그날 저녁에 제자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모여있다.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고,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고,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알 수 없는 혼란한 상태로 제자들이 모여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이 자기들 까지 해할까 한 곳에 모여 문을 닫고 숨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예수님은 그 문 닫힌 집에 들어와 가운데 서 계신 것이다? 게다가 말도 안되는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사실 예수그리스도는 오실 때 부터 우리에게 바라신 것은 평강었다. 눅2:14에“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 하였다. 헬라어로 ‘에이레네’ 그리고 히브리어로 ‘샬롬’으로 사용되는 이 평강이란 단어는 사회적으로는 주님의 정의가 가득한 상태,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평안한 상태를 말한다.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제자들에게 인간이 할 수 없는 전능자으로 오셔서 “샬롬”이라고 말씀하신다. 평안이 생겼습니까?그리고는 그의 손과 옆구리는 보이시고는 재차 말씀하신다.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지금 결코 평안이 있을 수 없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기적의 말씀을 하신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과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결코 평안할 수 없는 우리들에게 평강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려 한다.
1. 부활하신 왕께서 평화를 주십니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매일 평강을 가지고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평안하십니까?” 각자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평안의 상태를 바라며 서로에게 복을 빈다. 또는 일상의 언어로“식사 하셨어요?”등으로 인사한다. 밥먹기 어려울 시절에 밥먹는 것은 매우 중요한 안부였다. 밥 못먹고 다니는 사람들에겐 밥 한술 뜨고 가라는 정겨운 인사였다. “그간 건강하셨어요?” 그의 상태를 걱정해주고 위로해주는 인사이다. 그리고 참 이해가 안 되었던 인사인데 길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어디 가세요?”라고 인사한다. 요즘 느끼기에는 사적인 일에 왜 참견하니 싶겠지만, 일이 없어서 어렵던 시절에 어디를 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고 축복할 일이기에 이렇게 인사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에도 이렇게 평안하고자 하는 바람을 인사를 통해 나타낸다. 그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고, 그 사람의 마음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말하면 그만큼 우리 인간에게는 평안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누구나 평안을 바라나 평안하지 못한 이 가슴아픈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저는 한남제일교회에 오기전 2016년도에 교회에서 청년들과 함께 전라도 진도에 국내선교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 교회는 10년동안 진도군연합회와 연합하여 30여개 교회에 흩어져 전도를 하고, 여름성경학교, 미용봉사, 마을 벽화 페인팅 등의 선교활동을 하였다. 저는 여름성경학교 담당을 하여 시골 아이들과 신나게 성경학교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그 교회 담임목사님과 만남의 시간에 참 어려운 말씀을 꺼내시는 것이었다. “저희 지역 기독교군연합회에서는 세월호 사건이 나고 누구보다 그 사고 현장인 팽목항에 가서 가장 먼저 달려갔습니다. 구조하시는 분들에게 물과 필요한 물품을 보조해 드렸고, 가장 오래동안 그 곳을 지켰습니다. 저도 거의 2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그곳을 지키며 돕고 기도하고 섬겼습니다.” 그 지역에 일어난 짐을 안고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세상의 뉴스에선 한번도 나오지 않고 인터뷰조차 요청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방송에 잠깐 나온 것 빼면 지나가다가 부스가 촬영도 안되었다는 겁니다. 조금이나마 세상에 호소하고 교회들의 섬김의 모습이 보여졌으면 했지만, 이제는 세상에는 기대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더 이상 인간의 노력으로는 헛된 기대와 평안을 바랄 수 없다는 이유로 그곳을 가는 것을 그만 두었다고 말씀하였다.
우리에게는 참 샬롬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말고는 사회에서 결코 참된 평안은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53:5에 예수님이 오심을 예언하면서“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아무 일이 없어서 평강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로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해서 쉼이 아니라, 예수님이 평강을 주시기에 우리는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믿으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하심과 부활하심으로 참 평안을 누리기를 축원한다.
2. 부활하신 왕께서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평강을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평강이 있기를 재차 바라며 자신의 이 땅에 오신 존재의 목적을 다시 말씀하신다. 우리가 수요기도회의 말씀과 교재의 핵심교리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각각 세분(위)로 계시나 세 분(위)은 곧 하나다’라는 교리입니다. 세 분의 관계에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보내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스스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았고, 세상을 구원할 목적으로 사명을 가지고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제자 삼었다. 다시말하면 모든 믿는 자를 예수님 닮게 하였다. 그러니 우리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세상에 보내진 자들이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를‘사도’로 보내셨다. 헬라어 ‘아폴스톨로스’라는 단어는 ‘보냄받은 자’라는 뜻이다. 로마시대에 군대 사령관들을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 부대를 이끌어 갈 권한과 힘을 가지고 보냄받은 자와 같이 사도는 예수님의 보낸 받은 복음의 사령관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분명한 권한이 있는 자이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이제 그는 자기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보낸자의 이름과 그 뜻대로 행해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다 보면 여러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힘이 들어 지칠때가 있다. 저도 20살이 되어 청년교사로 어린이 사역팀에서 봉사했다. 주일이면 아침 8시에 예배 방송준비를 시작으로, 9시 예배에 방송실, 11시 예배에 담임교사, 1시 예배에 찬양팀, 3시에 찬양팀연습, 5시에 청년예배, 7시에 저녁예배를 위한 어린이 돌봄 예배교사, 9시에 청년부 기도회, 모두 마치면 10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가곤 했다. 아무리 신학생이였다 해도 참 쉽지 않은 일정이었다. 이러한 봉사의 기준이 나에게 있고 나의 수고가 커지면 커질수록 인정받지 못함에 섭섭한 마음이 커지게 된다.
봉사란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돌보는 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봉사를 하려면 주님의 은혜를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는 내게 주시는 은혜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일을 감당하려면 나의 봉사를 넘어 사역이 되어야 한다. 나보다 더 크신 예수그리스도의 뜻인 사명으로 감당하는 사역이다. 사명이란 이것을 주님께 받은 명령이고, 사역이란 보냄받은 자들이 감당하는 주님의 일이다. 우리의 존재를 나에게서 찾기보다 나를 구원하신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찾아야 한다. 주님의 보내신 사명을 발견한 때 어디를 가든지 담대하게 설 수 있다. 내 존재가 자체가 구원받은 자이며, 내가 하는 일은 주님이 맡기신 일이 된다.
지난 고난주간에 한주동안 새벽기도회가 끝나고 마을청소를 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시고 각자 맡은 부분들을 정말 정성껏 깨끗하게 청소에 동참해주셔서 참 감사드린다. 청소를 하기 전 한남동 주민센터에 요청을 하여 청소도구와 쓰레기봉투를 지원받았다. 또 청소 진행보고를 하였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있어 지자체에서는 청소모임이나 봉사를 시행하지 못하였다. 이럴 때 지역을 위해 봉사해주시니 너무 감사해 하셨다. 교회와 주민센터 사이에 한곳에 담배꽁초가 너무 많아서 권사님들과 함께 치우고 있었다. 한 분이 지나가시면서 말을 걸어오셨다. “저기 언덕위에 골목에도 여기처럼 쓰레기가 엄청 많아요. 거기도 좀 청소해줘요”“아 그래요, 저희가 지금 자원봉사하는 중이라 멀리 가긴 어렵네요” 그랬더니 그 아주머니께서 “업체인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그럼 제일교회에서 나왔어요?” 라고 하시는 겁니다. 교회에서 나왔다고 말도 안했는데 지역 주민으로 이미 교회를 잘 아시고 지역의 섬김을 유심히 보고 계신 것을 느꼈다.
저는 예수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지만 내 착한 행위가 드러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지역을 위해 섬길 수 있다라는 사실에 감사가 나왔다. 우리를 보내신 예수님을 사역이 힘들어서 안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보내신 뜻대로 섬기는 제자가 된 것이 감동되기에 감당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왕으로 이 땅에 오셨듯, 우리도 우리의 교회와 가정과 지역에 예수님이 보내신 왕으로 섬기는 왕이 된 줄 믿는다.
3. 부활하신 왕께서 성령님의 능력을 주십니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에게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쉰다. 우리나라의 어른들이 종종하는 말이 있다. “한 숨시지만 복나가”사람이 무슨 걱정이 있거나 긴장했을 때 한숨을 쉬게 된다. 그래서 주위의 어른들은 그 한숨을 쉬면 땅이 꺼지는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전해진다. 그래서 걱정이 있음에도 티 내지 않으려고 한숨을 많이 참고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 이 큰 숨으로 창조되었다. 창2:7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한다. 사람의 존재가 육의 존재만이 아닌 하나님의 생기, 숨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숨은 히브리어로 “네솨마”, 헬라어로는“프뉴마”로 사용된다. 숨을 내쉬는 존재가 살아 있는 존재라 할 수있다. 거룩한 숨 곧 프뉴마로 기록된‘성령’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나왔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주님이 주시는 성령으로 호흡하는 존재들이 되었다. 모두 성령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전적으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셔야 살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사명을 가지고 일 할 때는 반드시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무기는 엡6:17에 기록된 것처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시면서 그 성령의 무기가 무엇인지 다시 설명한다. 그 무기는 사람을 죽이고 심판하는 무기가 아닌, 죄 사함의 권세의 무기이다. 오히려 이 무기로 인해 상대하는 자들의 죄가 용서되고, 그들이 변화되며, 그들이 생명이 살리는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우리는 보냄받은 목적대로 사용해야 한다. 모든 물질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 아무리 일이 잘 되었어도 그 목적이 목적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제일 먼저 목적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믿는 자들을 향해서 우리를 보내시는 목적을 다시 확인하신다. 성령을 함께 보내시며 예수님이 죄인을 용서하신 것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하고 회복하는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가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살아갈수 있는 이유가 예수님이 보내셨기 때문이다. 내가 하려고 하면 소모하다 지치고 넘어지게 되지만 나를 보내신 예수님의 사명으로 감당 하면 예수님이 책임지신다. 예수님이 감당케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거저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과 무기가 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케 하신다. 그리고 그 보내신 목적은 죽이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살리는데 있다.
평강이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전히 불안하십니까?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힘이 드십니까? 잠시 숨한번 크게 들이쉬고 나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그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하시며 주님이 보내신 사명 잘 감당해 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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