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16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2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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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남제일 작성일23-11-03 15:33 조회35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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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설교 : 말씀으로 거룩하게 보내는 추수감사절>
<3분설교 : 교회가 그래야되요>
<3분설교 : 가진 것 없지만>
추수감사주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다. 감사하는 날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감사해야 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감사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셨다. 거룩은 구별됐다는 말이다. 세상과는 달리 하나님의 거룩으로 구별되고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거룩함 으로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특별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실 뿐 아니라..하나님이 같이 되라는 비전을 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질 수 있을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음을 감사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23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하셨다. 우리는 모두다 죄 가운데 태어났다. 거룩하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 구원자로 보내 주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죄 값은 사망인데 다 갚아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다..죄 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면서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를 힘쓰기를 성령을 사모했다. 성령이 충만하게 제자들에게 임하자..120명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성령을 충만히 받았고 각 나라말로 방언을 하는데..하나님이 하신 큰일들을 말하니까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놀라고 다 당황하면서 이 어찌 된 일이냐? 했다. 이에 베드로와 열한 제자가 서서 소리 높여 외쳤다.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사람들은 “내 죄는 어찌할 꼬 ?”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공로를 믿지 말고..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그러면 죄 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받아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사람들은 베드로의 말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자그마치 삼 천 명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 때문이다. 대속의 은혜, 구원의 은혜, 죄 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한다. 성경의 추수감사절은..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농사를 지어 추수할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는 날이다. 노예가 아니다. 이젠 주인이다. 땅의 주인이 되어 농사를 지었으니..그 감사와 감격을 주신 하나님을 잊지 말고 감사하는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세계가 전쟁과 기후변화 그리고 미국 발 경제위기로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럴 때 교회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감사함으로 시대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3:11~12)하셨다. 한 가난한 여성도가 금식기도를 마친 후 빵과 물 한 컵..보잘 것 없는 음식이다. 진수성찬을 먹어도 배고플 수 있다. 그런데 고작 먹을 수 있는 것은 빵과 물 한 컵이다. 그 빵과 물 한 컵을 손에 들고 이렇게 기도했다. “오! 이 모두와 그리스도가 다 내 소유라니..감사합니다!”한 청교도 설교자도 가난한 사름들의 양식인 청어와 감자를 놓고 이렇게 축복 기도를 했다고 한다. “주여, 주님께서 바다와 땅을 샅샅이 뒤져 주의 자녀들의 양식을 구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하나님께서 세상을 다 뒤져서 주실 수 있는 것이 청어와 감자뿐이겠는가? 그러나 이 청교도 설교자는 그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고백하며 그 작은 보잘 것 없는 음식에도 만족하며 깊은 감사를 드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한 것이 많다고 해서 족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더 가지려고 몸부림을 친다. 반면에 그야말로 쥐뿔도 없으면서 자족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 귀하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시고..소유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내 안에 모셔드리는 자..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이다. 내 안에 계심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께 깊은 감사를 드린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이다. 여러분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찬송에도 있듯이..“나 지금 죄에서 사함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 이 육신 장막을 벗을 때도 겁날 것 없겠네.”죽어도 겁날 것이 없는 거룩함이라는 영적인 재산..주님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우리도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백성이 되고 성령을 모신 거룩한 성전 됨을 감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즉시 그 아이는 작지만 완전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사람 구실을 하려면 커야 한다. 육체도 커야 하지만 마음도 인격도 커야 한다. 그래서 공부하는 것이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그래도 더 배워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요새는 신문을 봐도 웬만해서는 놀래지도 않는다. 하도 사람 같지 않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어제는 층간소음 문제로 밤 1시에 위층에 올라가서 망치로 몇 사람을 죽인 살인사건을 보았다. 아무 문제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 일으킨 분노의 끔찍한 살인이라는 것에 전문가들은 충격이라고 한다. 이런 일은 교회 공동체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절대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 로마서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하셨다. 갈라디아서2:20에서도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하신 것처럼 내 안에 게신 그리스도..로 살아갈 때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세상에 사는 동안..3가지에 매여 있다. 첫째는 육신, 두 번째는 세상관습, 세 번째는 마귀의 유혹이다. 이 세 가지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분, 예수님을 믿는 믿음뿐이다. 예수님으로만 승리할 수 있다. 부목사 때, 금호동 산동네 구역에 귀신들린 청년이 있다고 해서 기도하시는 권사님 집사님들하고 심방을 갔다. 그렇게 떠들더니..우리들을 보고는 잠잠해졌다.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다. “예수 이름으로 물러갈 지어다!”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는 것을 보았다. 자랄 때, 한얼산기도원에서 목사님께서 병 고치는 치유집회, 귀신을 쫓는 축사집회를 하실 때 면 항상 예수이름의 능력으로 기도하셨다. 저 역시도 병 고침을 받는 은혜를 받았다. 예수 이름은 구원의 이름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이다. 오래 전에 병으로 고통 받던 집사님 한 분은 성찬식에서 빵과 잔을 받으면서..‘예수 이름으로 고쳐질 지어다!’고침 받았다고 간증을 하셨던 적이 있다. 예수 이름은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신 능력이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야말로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살았다. 지난 주간에 탈북청소년학교인 한꿈학교의 수학여행이 있었다. 설교를 하는데..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저 역시도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아버지와 만주 봉천에서 살다 오신 어머니..남한에는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이 외롭게 자랐다. 명절이 되면 친구들은 하나같이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고 동네에는 저와 동생만이 덩그라니 남겨 있다. 친구들이 세뱃돈을 받고 자랑할 때 마다..부럽다는 생각보다 누군가 곁에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힘들었다. 지금도 그렇다. 탈북학생들이 공감을 하고 경청한다. 그런데 내가 자란 교회에서는 나에게 학용품을 주고 장학금을 주어 공부할 수 있었다. 돈이 아니라..교회공동체가 주는 사랑이고 위로이고 힘이 되었다. 얼마 전 신문에 비오는 날 폐지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던 여성이 있었다. 도착한 후에 여성은 지갑에서 삼 만원을 꺼내 노인의 손에 쥐어 드렸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 고 하셨지만 돈이라는 것을 잘 사용하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그러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성전에 모이지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고 서로 기도하고 축복하고 가진 것을 나누었다. 가난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불평등한 세상에 평등하게 만들어 가는 신앙공동체..경쟁이 없이 서로 섬기는 것은.. 성령이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이다. 우리 한남제일교회가 이 어두운 시대의 희망이고 빛이 되어야 한다. 자라면서도 목회를 하면서도..예수님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었다. 이처럼 예수의 몸 된 교회는 거룩하다. 교회 공동체 안에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성찬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이다. 같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면서 주안에 거룩한 한 형제자매가 되는 은혜의 성찬이다. 고린도 후서4:11-12에는 내가 죽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라..예수 생명이 나타나게 하라고 했다.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예수가 나의 주인이 될 때..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거룩함의 축복..진정한 자유와 승리가 있게 되는 것이다. The Grace, 감사의 기도라는 제목의 그림이 있다. 한 노인이 빵을 놓고 기도하는 잘 알려진 그림이다. 1918년, 미국의 한 탄광촌의 사진관에 신발 털이를 팔러온 노인이 있었다. 행상으로 지친 몸을 잡시 쉬고자 했다. 초라한 보따리에서 빵과 스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시고는 두 손을 모은 채 감사기도를 드리시는 것이다. 이 광경에 감동과 전율을 느낀 사진사 에릭 엔스트롬은 사진을 찍었고 나중에 그 딸이 유화로 그렸다. 비록 가난하고 삶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감사기도를 하는 노인은 세상의 누구보다 부유하신 분이다. 이 그림은 당시 세계1차 대전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아직도 감사할 것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 살 힘과 용기를 주었다. 요즘 교인들 중에 식당에서 식사 기도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예수님도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 밥을 먹을 수 있지만 거룩한 성도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거룩한 삶이 되는 것이다. 감사할 것이 너무 많아서 굳이 감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이 세대가 아닌가? 감사할 줄 아는 성도야 말로..우리는 시대의 감동과 전율이다. 성경은 말씀으로 거룩해 진다고 하셨다. 추수 감사절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초청하여 함께 잔치를 나누라는 것이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레위인..등이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나눔의 현장에서 공동체 속에서의 거룩함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 자신과 교회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즉 공동체 속에서도 거룩을 이루며 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는 공동체가 하나님나라이다. 예수님은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빵을 나눔으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고 하셨다. 주님의 몸을 나누는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서 한 형제자매이다. 사랑을 할 수 있는 형제자매가 함께 함에 감사하자. 감사로 거룩함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절이고 주님의 성찬을 나눈다. 군대에서 돈가스를 1인당 2개씩 나누어 주었더니..병사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스가 없다고 한다. 보급 받는 부식 담당 병사가 실수로 돈가스 두 상자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불평을 한다.“소스도 없이 돈가스를 2개나 먹으라는 말이야?” 그 때 한 고참병이 말했다. “야! 우리들은 불평할 필요가 없다. 분명히 지금 어느 부대 애들은 소스만 2개를 먹고 있을 거야.”같은 사건을 두고서 불평을 선택할 수도 있고 감사한 마음을 선택할 수도 있다. 같은 사건을 보고서 순간순간마다 선택해야할 일이 있는데..이것은 습관이다. 불평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평을 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감사한다. 메튜 헨리는 “감사는 산수에서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했다. 디모데전서 6:6에는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여러분은 경건을 위하여 감사를 선택하는가?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 감사하자!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충만히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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