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9-14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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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남제일 작성일23-12-16 14:21 조회2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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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7 대림절3주 주일예배

 

 

<3분 설교 | 신앙의 자세가 변해야 >

<3분 설교 | 하나님의 다스림과 의로움>

<3분 설교 |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에만 >

 

 

가스펠프로젝트 신약 2-5

설교자 : 오창우 목사​
제목 : "바래새인과 세리 비유"
본문 : 누가복음 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231210 가스펠프로젝트 신약 2-4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탕자 비유” (15:11-32)

 

오늘은 대림절,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두 번째 주일이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은혜를 받고자 한다.

탕자의 비유의 내용을 보자.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서 먼 곳으로 떠나 방탕한 생활로 다 탕진했다. 아버지를 떠나면 이렇게 삶이 망가지는 것이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돌아간다.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반겨주고 잔치를 베푼다. 그는 비로소 다시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아버지의 집에 돌아올 때만이 누리게 되는 복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 안에서 살 때에만 생명을 얻고 살 수 있다. 그런데 맏아들은 둘째 아들,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가 못 마땅하다. 그는 아버지 집에서 늘 같이 살았지만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다. 아버지 집에서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형통하고 행복해야 하는데, 정작 아버지와 함께 있는 맏아들에게서는 전혀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가만히 보니 맏아들은 둘째 아들보다 아버지에 대해서 불만이 더 많다. 맏아들이 집에 돌아오니 잔치가 벌어졌다. “아니 아버지 말을 잘 듣는 나를 위해서 염소 한 마리도 잡아 주지 않던 분이 글쎄 창녀와 놀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를 위해서는 실진 송아지를 잡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자녀들 입장에서 보면 부모가 자녀들을 차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아버지에 대한 불신이 형제간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현실도 보여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31-32) 아버지의 것이 맏아들 네 것이라고 하시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는 여전히 큰 아들을 사랑하고 두 아들에게 공평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둘째 아들과 맏아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첫째, 둘째 아들은 죄인들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시에는 수많은 죄인들이 있었다. 율법의 관점에서 보면, 병든 자도 죄인이고 귀신들린 자도 죄인이고 돈 많은 세리도 죄인이고 몸 파는 창기도 죄인이다. 말 그대로 탕자인 셈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듣고 예수께로 돌아와 병도 낫고 귀신도 쫓아내고 돈을 버리고 주의 제자가 되었다. 돌아온 탕자들이다. 이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켰다.

 

둘째, 맏아들은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한다.

이 비유의 대상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고 했다.(3) 그들은 택함 받은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율법의 교훈을 받아 보관했던 진리의 백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보시기에 탕자이다. 율법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할 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는 다르게 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탕자를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창녀와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라고 하지 않는가? 예수님을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가져야 하나님의 자녀이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한 일은 관계회복이다. 새 옷과 가락지 그리고 새 신발은 아들로서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는 장면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회복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맏아들도 아버지와 함께 살기는 했지만 깊은 관계를 갖지 않고 살았다. 맏아들이 아버지가 탕자를 회복시켜 주는 일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는가? 그래서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너는 항상 나와함께 있으니 내 것이 네 것이로되 아버지는 관계의 회복을 원했다. 맏아들의 성실함이나 둘째 아들의 무모한 삶이 문제가 아니었다. 둘째 아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것은 그가 했던 일 때문이 아니라 부자지간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관계회복을 할 수 있게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4,16)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이다.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살 수 있는가? 예레미야 29:11-13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이 말씀은 남 유다가 망할 때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나라가 망하는 절망적인 순간에도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냥 평안할 때 주신 말씀이 아니다. 절망의 순간에 주신 말씀이다. 그래서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다. 그런데 그것이 자동으로 되는 게 아니다. 분명히 평안을 주시고 희망을 주시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1) 주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12). 2) 온 마음으로 주님을 구하며 찾는 사람을 만나주신다(13)고 하셨다.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약속이 이루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해주신다. 그런 사람을 좋아하신다. 집안의 맏아들도 자기 의로 인하여 바른 복을 누리지 못했고, 집 나간 둘째아들도 율법의 족쇄로 방황하는 삶을 살았다. 우리 의와 율법으로는 결코 삶을 채울 수 없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5: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머물러있으라는 말은 주님 안에 텐트를 치고 살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행복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만이 만족하게 한다. 오늘도 그 아버지의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 그 아버지의 초청에 응할 때 우리는 자녀의 복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이 복음이요 관계회복이다.

 

둘째, 사람 살리는 일을 해야 하나님의 자녀이다.

누가복음15:32에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아버지에게 마땅한 일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어차피 둘째아들은 이미 자기 몫을 받았다. 이제 남아 있는 아버지의 재산은 다 자기 것이다. 아버지 역시 큰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다”(31)라고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임에도 아버지를 오해하고 동생을 향한 질투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어떤가? 자신과 동생을 끊임없이 비교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것이나 내가 더 많이 수고하였기에 나는 당연히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회개한 둘째보다 훨씬 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안타까운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멈춰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일이 복음 그 자체이다. 8:34-35에서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셨다. 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시나? 그것이 구원의 길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다! 맏아들과 같이 세상의 마음을 더 많이 품고 따르고 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보다 세상의 풍요로움을 따라가려는 마음이 훨씬 더 크다. 더 커지고, 더 강해지고, 더 부유해지려는 마음이 너무 많다. 낮아지고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려 해야 한다. 세상적인 명성을 얻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버리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한다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될 수 없을 것이고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다. 회개만이 살길이다. 맏아들이 되어버린 우리의 화석화된 신앙을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 사람 살리는 일에 우리의 복음이 있고 축복이 있다.

 

남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네 데벤테르라는 여성이 케이프타운 외지에 있는 주유소에 기름을 넣으러 들렀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지갑이 없었고 차 안에도 비상금이 없었다. 결국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기름을 넣지 않고 그냥 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유소 직원인 엠벨레는 주유를 꼭 해야 한다고 말했다.“이 고속도로에서는 위험한 사건이 많이 벌어집니다. 혹시 가다가 차가 서기라도 한다면 큰일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제 돈으로 적당한 기름을 넣어드릴 테니까 나중에 또 방문하게 되시면 그때 돈을 주세요.” 그리고는 이름도, 전화번호도 묻지 않은 채 그냥 보내줬다. 모네는 엠벨레가 6명의 가족을 챙기면서 넉넉지 않은 형편에 늘 선행을 베풀며 기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자신의 사연을 소개하며 후원을 하자는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엠벨레가 베푼 몇 만원의 선행에 감사를 하면서 모인 돈이 4천만 원이다. 작은 선행을 베푼 돈이 천배 이상의 거금으로 부풀려져 돌아온 것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선행은 반드시 더 큰 복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런 행운을 바라며 선행을 실천하지 말고 선행 그 자체로 기쁨을 느끼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의 자세이다. 나에게 찾아오는 힘들고 불쌍한 처지의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만큼 돕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살 길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라고 증거 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족이 살리라!”전도자로 산다는 것은 살리기 위해서 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보듯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강도만난 자를 살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우리 교회가 오늘까지 이렇게 설 수 있는 것은, 다 예수 제자가 되어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던 분들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감사하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는 대로 복을 주실 것이다. 수고하시는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복을 받으시기 바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으로 예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를 바란다. 진정한 축복의 삶은 기도할 때마다 그토록 많이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를 정말 아버지로 인정하며 따라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지금 바로 그런 자녀를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바로 그 자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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