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1:6-14 "피상적인 예배가 문제를 일으키다"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23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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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남제일 작성일23-08-05 14:31 조회433회 댓글0건

본문

230806 주일예배 

 

<3분설교>

 

가스펠프로젝트 구약 6-12

설교자 : 오창우 목사​
제목 : 피상적인 예배가 문제를 일으키다
본문 : 말라기1:6-14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짐승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30806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가스펠프로젝트 구약6-12

“피상적인 예배가 문제를 일으키다”(말1:6-14)

   오늘은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를 본다. 말라기 이후로 신약성서가 시작이 되기까지 400년간 영적 암흑시대를 살았다. 말라기에서는 예배가 주요 단어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이다. 예배를 통해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변화되는 재창조의 시간이다. 그런데 말리기선지자는 예배에서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말라기서는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왔다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고 에스라를 통해 율법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받고 바사나라로 돌아간 이후의 상황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본 것처럼 이스라엘은 성전과 성벽을 건축함으로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영적으로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며 살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총독 일을 마치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간 이후부터 백성들의 신앙은 변해 버리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형편은 별로 나아지기 보다는 오히려 더 나빠졌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의 예언이라면 성전건축이후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로 갖가지 복이 임해야 하는데 없다! 오히려 가뭄과 병충해가 심하여 흉작이 거듭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 종교는 미신과 뒤섞였고 적당주의와 냉소주의가 편만했다. 강자는 약자를 압제하였고 언약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은 외면하는 등 사회적으로도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 위해서는 예배가 변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가스펠 프로젝트는 ‘피상적인 예배가 문제를 일으킨다.’고 하면서 피상적인 예배의 문제점을 3가지로 드러내고 있다. 이런 문제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3중직 신앙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어 보자.

첫째, 피상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하잖게 만듭니다.(말1:6-14)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다. 말라기 1:6-7에 나타난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이다. 1:6에 “내 이름을 ”하시는데 그 이름은 바로“만군의 여호와”이다. ‘만군의 하나님’은 8절에“만군의 여호와”9절에“만군의 여호와”10절에“만군의 여호와”11절에“만군의 여호와”로 자주 언급하신다. 만군의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군의 하나님은 어떤 뜻이 있을까? ‘만군’즉 집단, 대중, 군대 등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땅의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이나 천체우주, 하늘의 군대 등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만군의 하나님’을 찾은 사람은 바로 다윗이다. 거인 장수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하17:45) 만군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다윗이 믿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군대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인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사울 왕과 군대는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이 나타나자 전쟁에 져서 종이 될 것만 생각하고 겁을 먹고 두려워 떨고 있었다.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이 계시지만 실제로는 만군의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으로 만군의 하나님을 믿고 전쟁에 나갔던 것이다. 골리앗의 키는 2m가 넘었고 칼과 방패는 집채만 했으니 인간적으로 보면 두려워할 만하다. 하지만 다윗은 위기 상황에서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갔고 만군의 하나님은 물맷돌같이 보잘 것 없는 무기로도 승리하게 하셨다. 말라기 선지자는 다윗의 승리를 생각하고 ‘만군의 하나님’을 찾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만군의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가뭄과 흉작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는 육적영적으로 위기의 상황이 되었는데도 예배 때에 만군의 하나님을 찾거나 부르지도 않는다. 단순히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예배만 드릴 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없다는 것이다. 제사장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6절에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하셨다. 그래서 말라기 선지자는 만군의 하나님을 불러 외치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의 삶의 형편은 어떤가? 11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이방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의 사명의 촛대를 이방민족에게 옮기신다는 것이다. 계시록 2:에 예수님께서 심판의 주로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하신 말씀을 보면, “4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촛대를 이방인에게로 옮기신다고 하셨다. 우리의 예배를 보자! 위기 때에 다윗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배하고 있는가? 위기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다윗처럼 신령과 진정으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예배자는 반드시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둘째, 피상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깍아 내립니다.(말3:7-12)
   말라기3:7-12에는 ‘만군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말씀실천이 나온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규례를 지키며 살자는 것이다. 이것은 군대생활과 같다고 보면 된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진실로 만군의 하나님이 대장이시고 그 부하라는 것을 인정하고 만군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규례를 지키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로마서12:에 말씀하시는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이다. 예배는 단순히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만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도 거룩한 예배가 있다. 삶의 현장에서의 예배야 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의 예배만큼 삶에서의 예배는 거룩하지 않고 극히 세상적이다. 우리는 어떤가? 여전히 갑질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세상 따라가면 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순종은 크게 3가지 죄이다. 1)제사장들의 죄악(1:6-2:9)이다.-성전 제단에 훔쳤거나 눈이 멀거나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1:8,13). 2) 백성의 죄악(2:10-16)이다.-이스라엘 남자들은 동족의 아내들을 버리고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혼혈 이방 민족들과 잡혼을 하고 서로 속이며 신의를 지키지 않았다. 3) 사회적 죄악(3:5-18)이다. -음란했고 점치는 자들이 많았으며 일꾼의 노임을 떼어먹고 힘없는 자들을 학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상황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3:5) 하셨다. 이런 심판과 동시에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다. 3:7에 “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가리라”예수님은 하나님의 규례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으로 돌아가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맺음이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대표적인 것이 십일조생활의 회개이다. 하나님께서 3:8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하셨다. 3:9에는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하셨다. 예수님은“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다. 십일조와 매주 드리는 주일헌금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마음의 가시적인 표시이다. 민수기18:21에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신명기14:28-29에는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십일조는 축복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고 제사장과 레위인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와 같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먹어 배부르게 할 수 있게 사용이 되면 반드시 축복하신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 주의 종들과 가난한 이들을 가난하게 하니까 3:5에“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래서 10에 “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하신 것이다. 이처럼 십일조는 돈 그 자체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권리라도 되듯이 당연시하였고 하나님을 채무자로 간주하는 오만한 자세를 취했다. 언약 백성으로서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올바른 믿음 생활은 하지 않으면서 새 성전을 통해 주시기로 약속한 복들을 내리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하나님께 성의껏 제사를 올리거나 죄를 회개하거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빈정거렸다. 사회적 약자인 주의 종들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였고 언약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은 외면하였다. 하나님은 이 같은 백성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에는 하나님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종교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십일조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메뚜기 재앙이나 포도나무열매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열심히 일해도 결실이 없다면 십일조 생활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십일조의 긍정적인 축복은 “12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이다. 저는 누구보다도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도 십일조의 축복을 믿는 사람이다. 헌금을 힘에 지나도록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리고 교육관 건물을 살 때에도 십일조로 드리자고 했다. 그래서 외국인들을 위한 예배처소를 십일조로 드렸고, 유치부실을 살 때에도 선교사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를 드렸고, 주차장 부지를 살 때에도 주민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나, 본당의 1층을 주민과 함께 쓰는 카페로 멋지게 만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을 돌려 드린다는 의미의 땅에 대한 십일조였다. 오늘의 예배당을 지을 수 있게 하신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십일조의 축복이라고 믿는다. 찬송가 449장에도 있지 않는가?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할렐루야! 환한 길 축복의 길을 가고 싶은가? 예수 따라가며 복음에 순종하라! 십일조는 하나님 사랑을 이웃사랑으로 승화시켜 축복을 받는 길이라는 것을 믿고 행하면 산다. 그렇다. 십일조순종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삶의 지경을 넓히는 축복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셋째, 피상적인 예배는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말4:1-6)
   말라기 4:1-6은 만군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에게 축복, 왕의 축복이다. 4:1-2에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하셨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두 가지 심판이 있다. 하나는 교만한 자, 악한 자에게 용광로 불로 살라서 뿌리도 없이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상처를 치유하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희망의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축복을 받고 계시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신다고 하셨다. 이 공의로운 해는 예수님을 의미한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선지자가 누가복음1:77-79에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성령으로 예언했던 그 ‘돋는 해’가 예수님이고 ‘공의로운 해’ 이다. 그 빛이 우리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으로 죄 사함을 받는 치료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임재로 바울 사도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는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 예수 안에 주시는 축복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한 다윗을 보라! 이스라엘의 2대 왕이다. 왕이 되고자 하는 그 어떤 인위적인 노력도, 정치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블레셋을 공격하는 그 때에도 하나님께 묻는다. 블레셋을 치러 가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또 방법을 간구한다. 사실 수많은 전쟁가운데 다윗이 싸울 줄 몰라서 ‘지금 공격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물은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경험을 믿고 전쟁터에 나간 것이 아니라 승리케 하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갔던 결과 블레셋을 완전히 전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다윗처럼 전쟁과도 같은 세상에서 먼저 하나님께 묻고 있는가? 너무도 쉽게 나의 경험이라는 칼과 창을 의지하고 세상이라는 전쟁터로 나가는 것은 아닌가? 나의 경험이 하나님보다 앞서고 있지는 않는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승리하려면 반드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명령과 규례대로 살아야 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5:10) 그는 그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했고, 하나님은 그를 점점 강성케 하셨다. 로마제국은 235년부터 50년간 무려 18명의 황제가 즉위했으니 평균 재위 기간은 2~3년 정도였다. 황제 대부분이 암살당하거나 자살·전사했다. 늘 불안했고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포악함도 서슴지 않았지만 결국은 비참하게 또는 추악하게 삶을 마감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세 가지 질문이 있다. ‘꿈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얻은 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축적된 복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이 세 가지를 다 이룬 사람만이 아름다운 인생이었다고 평가받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편지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4:7~8) 고백했다. 선한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 나가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얻은 복을 베풀고 나누며 살아가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과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 이렇게 우리를 예수 안에서 진정한 왕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을 찬양하자! “1, 주의이름 송축하리 주의이름 송축하리 지존하신 주의이름 찬양/ 주의이름 송축하리 주의 이름 송축하리 지존하신 주의이름 찬양/ 2, 거룩하신 주의이름 거룩하신 주의이름 거룩하신 주의이름 찬양/ 영광스런 주의이름 영광스런 주의이름 영광스런 주의이름 찬양/ 3, 영광스런 주의이름 영광스런 주의이름 영광스런 주의이름 찬양/ 후렴, 주님의 이름은 강한 성루 그곳에 달려간자 안전하리/ 주님의 이름은 강한 성루/그곳에 달려 간자 안전하리”그렇다. 말라기의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이다.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은 여러분과 저를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성전과 삶의 예배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러분에게 치료하는 광선이신 예수님으로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만군의 하나님의 승리하게 하시는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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