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 지키기"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2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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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남제일 작성일23-05-19 13:46 조회5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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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1 주일예배
<3분설교>
가스펠프로젝트 구약 6-1
설교자 : 오창우 목사
제목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 지키기
본문 : 다니엘1:1-7
1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 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3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4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5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6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230521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가스펠프로젝트 구약6-1
“그럼에도 불구하고”(단1:1-21)
-바벨론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승리하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는 이런 숨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예수님의 모델을 찾기 위해 성전에서 기도를 드렸다. 그때 성전 한 구석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청년이 있어서 살펴보니 예수님과 흡사해 보였다. 평화로운 모습과 자비로운 인상, 눈에서는 빛이 났고 위엄이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모델로 예수님을 그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가던 중 가룟 유다의 모델을 찾다가 이번엔 술집에서 만취한 청년을 보게 되었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흐르고, 표정에는 욕심이 넘쳐 보였다. 그를 가룟 유다의 모델로 그려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가까이 가보니 놀랍게도 예수님의 모델이었던 그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의 예수님과 가룟 유다 모델은 같은 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선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단의 형상을 지닌 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오늘은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로만 구성된 나라에서 끼리끼리 살다가 바벨론이라는 영적으로 악하고 혼란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으로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 승리할 수 있는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주일에 예배를 드린 그리스도인 된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영적으로 승리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세상에서의 삶은 어떠한가?
첫째, 정체성의 혼란이 왔다.(단1:1-7)
정체성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인가? 에 대한 대답이다. 처음 학교에 간 초등학생이 새로운 환경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 학교는 가정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선생님말씀을 잘 듣고 친구들과도 잘 놀아야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체성을 바로 갖지 못하니까 수학여행을 갔는데 엄마가 따라가서 먹는 것 챙기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신문에 난 적이 있다. 직장면접에도 따라가는 부모도 있단다. 그런 부모가 있으니까 아이가 학교생활을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직장생활도 그렇다 학교와는 전혀 다른 사회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를 않는다. 본인의 실력으로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정체성의 혼란이 오는 경우가 온다. 이처럼 정체성이란 ‘내가 누구인가?’라고 하는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던 다니엘과 3친구는 바벨론 나라에 멸망을 당하고 이젠 포로로 잡혀왔다. 새로운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벨론의 왕은 다니엘과 3친구에게 바벨론식으로 살라고 교육하고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정체서의 혼란이 온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데 세상이 원하는 것은 바벨론의 아들이 되라는 것이다. 바벨론의 제국통치는 무서웠다. 앗수르제국은 그 땅의 백성들을 다른 나라로 옮겨 살게 함으로 더 이상의 저항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바벨론은 다르다. 백성들을 바벨론화 시키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한국말을 쓰지 못하고 일본말을 쓰고 일본역사, 일본문화, 일본종교까지 하게 했던 문화통치라고도 할 수 있다. 바벨론이 택한 전략이 이처럼 무섭다. 먼저 1) 분리를 시켰다. 3절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궁에 설만 소년을 데려오게 하여 ”똑똑한 사람만을 뽑아냈다. 차별을 둔 것이다. 다음은 2) 교육이다. 바벨론 식 교육을 시켰다. 4절에 “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당대의 최고의 문명이다. 바벨론의 종교와 문화를 가르치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하면 일본제국주의시대에 일본에 유학한 분들은 일본방식이 미국유학을 다녀 온 분들은 미국방식이 유럽에서 유학한 분들은 유럽이 옳다고 하는 것을 보고 있다. 객관적으로 보기가 어렵다. 교육을 받으면 반드시 바꾸게 되어 있다. 3) 충성이다. 5절에는 “ 왕의 음식과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3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왕의 음식을 먹게 함으로 왕의 사람으로 충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과 같다. 먹는 것을 주는 수령에게 충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4) 창씨개명이다. 7절에 “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니엘의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장’하나냐는 ‘여호와는 자비하시다’미사엘은 ‘누가 하나님 같을까?’아사라는 ‘하나님이 도우신다’이다. 그런데 바벨론 식으로 하니까 다니엘은 벨드사살-‘벨신이여 그의 생명을 지켜 주옵소서’ 하나냐는 사드락-마르둑‘벨신의 명령’, 미사엘은 메삭-‘아쿠신같은 이가 누구인가’, 아사랴는 ‘아벳느고’- 바벨론 지혜의 신‘ 등 이다. 본래의 이름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데 바벨론의 신들과 관련된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완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백성의 자부심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아주 무서운 전략으로 다니엘과 3친구를 바벨론식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바벨론의 포로생활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했다. 여러분은 어떤가? 학교에서 직장에서 교회 나간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어느 때 보다도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정체서의 혼란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체서의 혼란 속에서 다니엘과 3친구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둘째, 거룩을 지켰다.(단1:7-16)
8절에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라고 했다. 왕이 주는 음식이나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거룩은 성스럽고 위대하다는 뜻이다. 부족한 사람이 성스럽고 위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임마누엘’,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시기 때문에 거룩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다. 거룩을 지키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다니엘을 맡은 왕을 섬기는 내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다. 내시 환관장은 왕이 두려운 중에도 다니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12절에 “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감독자에게 10일의 기간을 주어 왕의 음식을 먹은 소년들과 채식만 다니엘과 3친구들을 비교하기로 한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그렇다. 15절에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였다고 했다. 거룩을 지키니까 하나님의 거룩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성경에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피하리라고 하셨다. 마귀는 두려워 떠는 대상이 아니다. 대적하면 하나님께서 환관장에게 한 것처럼 승리할 수 있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40일 금식기도를 하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것과 같다. 마귀는 돌로 떡을 해 먹으라 또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천사가 받들게 해 보라 그리고 마귀에게 절하며 세상 권력을 주겠다고 했다. 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질 것을 유혹하는 마귀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경배한다고 하니까 마귀가 떠나가고 천사들이 수종 들었다고 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지는 법이다. 거룩함을 지키고자 하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가 세상의 법을 이기는 것이다. 16절에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세상이 인정하는 거룩함을 지켜내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기게 하신다. 할렐루야!
셋째,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며 살 수 있게 하셨다.(단1:17-21)
17절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했다. 왕이 말한 3년의 기한이 되자 왕 앞에 섰는데 왕의 질문에 대답하는 다니엘과 3친구 성경은 또 다시 19절에 “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했다.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을 부러 주시는 것이다. 20절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했다. 모세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 예레미야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 그들의 입에 말씀을 붙여 주신 것과 같이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 것이다. 21절에 보니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하고 난 후에도 다니엘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다니엘과 3친구는 바벨론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며 살 수 있게 하셨다. 영적 승리이다.
결국 영적 승리는 뜻을 정하는 것에 있다. 다니엘이 8절에 “나는 왕이 주는 음식을 먹고 몸을 더럽히지 않겠습니다!”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을 지키는 뜻을 확고히 정하니까 9절에 거룩함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은혜와 긍휼이라는 사랑을 부어 주신 것이다. 누구에게? 내시 환관장에게 . 다니엘이 뜻을 정한 것을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웃에게 영향을 미친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 한남제일교회 때문에 한남동이 복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환관장의 입장에서는 어려움이다. 왕의 음식을 먹게 하는 것은 왕의 명령인데 왕의 명령을 어긴다? 머리가 위태할 정도이다. 정상적이라면 생각할 수도 있을 수 없는 중대한 일이다. 그런데 목숨을 걸어야하는 결단을 한다. 미래도 가정도 다 거는 영적인 도박을 하고 있다. 누구를 위해서? 이스라엘의 젊은 소년을 위해서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이런 엄청난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1) 얼굴이 더 좋아졌다.
15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2) 거룩하게 하신다.
16절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3) 세상 학문, 책과 지혜는 물론 꿈과 환상도 주셨다.
17절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
4) 높여 주셨다.
19절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하고 20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5) 지켜주셨다.
21절“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고레스왕은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왕이다. 다니엘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넘어 새로운 나라에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정하고 사는 것은 분명히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성경의 조상들 역시 다 하나님께 뜻을 정하고 살 때 힘들었다. 하늘의 천사가 오면 쉬울까?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세상은 인정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세상이다. 세상은 악하다. 악한 영들이 세상이 육신이 다 ‘너 죽고 나 살자’ 이다. 살기 위해서 나를 죽여야 하는 것이 우리 육신의 정욕이고 세상관습이고 악한 영의 역사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거룩 을 지키고 사는 것이 쉬운가? 절대 아니다. 교회가 시작이 되고 나서 편한 적이 없다. 핍박의 연속이다. 요즘만 기독교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늘 시비하고 문제 삼고 오죽하면 우리교회가 개혁교회인가? 날마다 죽고 다시 사는 개혁교회 개혁을 밥처럼 하는 교회가 개혁교회이다. 변해야 한다. 오직 하나 다니엘이 뜻을 정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하나님으로 살 수 있다. 예루살렘에 가면 ‘통곡의 벽’이 있다. 그 벽 사이사이에 하얀 종이쪽지들이 가득하다. 그곳에 찾아간 많은 방문객이 자신의 기도소원을 꽂아두고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팩스 번호를 전 세계에 선전하여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팩스로 자신의 기도문을 보내는데, 팩스를 보내는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물론 사모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우리에게는 미신적인 믿음이 많이 존재한다. ‘예수 믿으면 잘 산다, 건강하다,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다 잘살고 건강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병들 수 있고 가난해지기도 한다.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 외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없으므로 예수만이 오직 구원자임을 고백하고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도 때때로 가난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놀라운 은총은 없어지지 않는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세상의 그 어떤 것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붙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황희 정승이 산 너머 마을을 가기 위해서 길을 걷고 있었다. 오랜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가볍게 짐을 싸고 출발을 했는데, 초행길이라 혹시 늦지 않을까 염려스러워 밭에서 일을 하는 농부에게 말을 건넸다.“어르신, 안녕하십니까? 저 산 너머에 있는 마을을 가려고 하는데 해지기 전에 도착을 할 수 있겠습니까?”그러나 농부는 아무 대답이 없이 묵묵히 밭일을 했다. 황희는 ‘매우 바쁘거나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인가보다’라고 여기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한참 뒤에서 농부의 목소리가 들렸다.“해지기 전에는 가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희는 아까는 아무 말도 없다가 왜 이제야 답을 하냐고 물었다.“허허, 그것 참, 어르신의 걸음 속도를 봐야 알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그렇다. 걸음 속도에 따라서 도착하는 시간이 달라지듯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따라 기도의 응답과 신앙을 통해 누리는 기쁨도 차이가 나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상처가 있는가? 정체성의 혼란이 오는가? ‘하나님이 계신가?’가만히 들여다보라! 들여다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상처를 자랑으로 바꿀 줄 알면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고 상처를 사랑으로 바꿀 줄 알면 어떤 공포도 극복할 수 있다. 믿음뿐만 아니라 생각과 가치관과 스타일까지 주님 안에 있는 거룩한 존재로 살아가라. 그것을 위해 투쟁하고 힘쓰는 삶이 바로 가나안의 삶이고 그것을 다짐하는 의식이 세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능력을 받겠다고 이상한 집회에 가거나 이상한 행위를 한다. 그러나 사실상 거룩함이 능력이다. 즉 성결한 존재가 되기를 힘쓸 때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하나님께 복을 간구하며 기도하기 전에 축복의 약속인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고 있나 돌아보라.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이다. 다시 묻는다. 세상이 살기 힘든가? 그럼에도 거룩해 지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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