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2:16-23“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두 가지 방법”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2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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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남제일 작성일21-02-06 10:19 조회2,347회 댓글0건

본문

210207

 

 

 


설교자 : 오창우 목사​
제목 :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두 가지 방법
본문 : 사사기2:16-23​

 

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



설교문

210207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두 가지 방법” (사사기2:16-23) 오늘은 사사기로 가나안 정복이후 가나안 땅에서 살았던 400년간입니다. 사사시대는 다른 나라처럼 왕들이 통치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시대에는 공평과 평등이 있었습니다. 불공평과 불의한 왕들이 다스리는 세상나라들과는 다릅니다. 모든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땅을 분배함으로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 친히 주권을 가지시고 통치하시는 나라가 사사기시대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통치를 위해 사사들을 세우시고 이방민족을 사용하셨습니다. 오늘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두 가지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통해 통치하셨습니다. 16-18절입니다. “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사사들 중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기드온이나 삼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사들입니다. 16절에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우셔서 노략자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17절에..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않았고 바알 신에게 절하고 음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조상들처럼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18절에..사사들을 세우셔서 구원하셨다고 했습니다. 18절에는 하나님께서 사사들과 백성들에게 역사하시는 중요한 문장이 나옵니다. “함께 하신다.”,“구원하신다.” 그리고 “뜻을 돌이키신다.”입니다. ‘함께’라는 말은 말 그대로 하나님이 사사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언제 함께 하시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17절에..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들에게 순종하지 않고 바알 신에게 절을 하여 조상들처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을 때에 함께 하신다고 하십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백성들의 지도자들인 사사들이 백성들이 바알에게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하나님은 사사들의 리더십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무능한 사사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사사를 세우셨기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셨고 세우신 자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든 장로든..교사든..찬양대든..식당사역이든..하나님이 세우셨기에 함께 하심으로 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구원받은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주셨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세우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사사들이 사는 동안..백성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다고 하십니다.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하나님이 세우셨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동안에..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사 개인의 능력으로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기드온을 보세요. 그리고 삼손을 보세요. 두 사람은 태생부터가 다릅니다. 기드온은 시골의 가난한 농부출신입니다. 삼손을 날 때부터 힘을 가진 장사입니다. 누가 더 사사로서 리더십이 있겠습니까? 삼손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보실 때에는 둘 다 똑 같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말 마음도 약하고 육체적으로도 능력이 없는 기드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시면서..“큰 용사여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나가니까..300명의 군대를 가지고 미디안의 메뚜기 떼와 같은 많은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무기라고는 나팔과 항아리에 감춘 횃불뿐입니다. 이것은 싸우는 무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것이..무기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세상의 무기를 물리쳤습니다. 캄캄한 밤에 미디안 진영에 가서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려 횃불을 높이 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미디안 군인들은 자다가 놀라서 서로 칼로 찌르고 죽이고 도망을 가다가 이스라엘에 완전멸망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은 함께 하심을 믿고 나가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삼손은 날 때부터 능력이 많이 있는 슈퍼맨으로 태어났습니다. 삼손의 능력 앞에 블레셋의 강한 군대는 두려워..이스라엘을 침략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들릴라의 꼬임에 빠져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두 눈이 뽑히고 커다란 연자 맷돌을 가는 소가 되어 하나님께 힘을 구했습니다. 머리가 자란 삼손은 마지막 힘을 다해 블레셋의 기둥을 무너뜨려 죽었는데..살아 있을 때보다 죽을 때 더 많은 블레셋을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구원을 하게 하시고 평화도 주십니다. 사1: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유다지파는 하나님의 승리케 하신다는 약속을 믿고 싸울 때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함락시켰습니다. 모세의 리더십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있었습니다..“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로 가며 이스라엘에게로 가리이까?”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세움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출애굽으로 승리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이 세우신 자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만이 예수의 증인이 되고 제자삼아 세례를 주는 사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와 바울사도는 배움이나 출신에 있어 차이가 매우 큽니다. 베드로는 어부출신으로 배움이나 재산이 없었고 바울은 당대 최고의 학문을 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질 정도의 능력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바울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으면..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기독교의 적이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으면 실패한 예수님의 제자로 갈릴리의 어부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위대한 사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세움을 받은 우리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사사들이 사는 동안에 구원해 주셨습니다. 또 하나 보셔야 할 중요한 사실은..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입니다. 백성들이..이방인들의 침략의 고통 부르짖음 중에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셨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부르짖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부르짖을 때 뜻을 돌이키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은 성경의 요절입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영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롬5:8에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죄악세상을 사랑하시고 죄인 되었을 때에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다른 신들을 따르다가..고난 중에 있었고 고통의 부르짖었습니다. 당연히 죄를 물으시고 대가를 치루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하나님은 부르시고 세워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의 고통에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탕자가 돌아왔을 때 달려가 맞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렘33:3)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120:1) 부르짖는 자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늘도 함께 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여러분의 하나님..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사랑한다. 내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네게 더 축복하노라” 사사들과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부르짖으면 응답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하심은..나를 하나님의 자녀와 일군으로 세우셨기에 함께 하시고..죄를 지었어도 부르짖음에도 응답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 세움을 받았음을 믿어야 합니다..가정에서 남편과 아내로..부모와 자녀로..세움을 받았습니다. 직장에서 일할 수 있게..하나님이 세우셨에..지금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바라고 믿을 때 증거를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약속인 성경을 읽고 쓰고..성경암송..성경큐티..설교말씀을 듣고 또 다시 들을 때 나를 세우셨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사를 통해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 구원과 평화가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들을 통해 통치하셨습니다. 19-23절입니다.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 이방민족이라고 하면 가나안을 비롯하여 주변의 나라들을 말합니다. 메소포타미아, 모압, 블레셋, 미디안, 암몬 등의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괴롭혔던 일 이 비일비재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방민족의 침략이라는 것은 나라가 약하면 당연히 당할 수 밖에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시고 사는 날 동안에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40년, 80년..평안했다고 하십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세상사에서..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의 평화는 하나님이 주신 평화라는 말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고이 싸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평화와 크신 능력 앞에 이방민족이 감히 침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이 침략을 받고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셨기 때문이고 진노의 도구로 이방민족들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방민족이 강해서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약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노이고 형벌로 이방민족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을 이스라엘의 잘못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사사들이 죽은 후에는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고 절하고 패역한 길로 가는데..타락의 정도가 조상들보다 더 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축복과 평화를 주는 약속을 어기고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잠14:1처럼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하신대로 망하는 길을 가는 이스라엘입니다. 시1: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음같이 하는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축복과 형통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악인의 길, 망하는 길을 가니까..“안 된다!”“스톱!”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들이 죽는 길 가는 것을 뻔히 보시니까 가지 못하도록..진노하시고 징계하는 것입니다. 히12:6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21절에 이방민족들을 진노의 방편으로 사용하시기 위해 22절에 쫓아내지 않고 두셨다고 하십니다. 23절에는 시험의 도구로 삼아..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지 않는지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시119:71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으로 이스라엘을 고난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시는 시험의 도구가 되어 유익한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평화를 깨드린 것은 이스라엘 자신이지 이방민족이나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사가 사는 동안에는 전쟁이 없이 평화를 누리던 이스라엘이 사사가 죽은 후에는..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알은 소위 풍요를 가져다준다는 잡신입니다. 바알제사에는 생명을 공급받는다는 구실로..가장이 여자사제들과 성적관계를 맺음으로 생산의 힘을 공급받는다고 하지만 이런 행위는 간음이고 성병으로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가정파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바알신앙은 술과 파티의 향락에 취하는 퇴폐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쳐 산채로 불에 태워 바치기도 했습니다. 부자 되겠다고 세상잡신을 따르고..복을 받기 위해서 간음과 향락과 살인을 서슴치 않는 바알신앙의 행태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방민족으로 고난을 주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요셉은 고난 중에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유혹을 이기고 감옥 생활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욥23:10에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여러분은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선택하여 욥처럼..요셉처럼.. 다니엘처럼..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일상의 평화가 무너졌습니다. 이어령 교수의 견해로 보면...1) 세계화와 글로벌한 세상의 평화가 깨져 지역으로 한정 되어 버렸습니다. 2) 선진국의 평화도 깨져 인권과 자유를 제한하는 나라들이 오히려 정의롭게 되었습니다. 3) 모임의 평화도 깨져..혼자가 되어 만남조차 못하게 되었습니다. 4) 디지털의 평화도 깨져 오프라인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이후..너 살고 나 살자 라는 상생과 공존의 생명화 시대만이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생과 공존의 세상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한 초대교회공동체입니다. 가나안 정복 후 이스라엘은 공평하게 땅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사사가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평화의 세상도 상생과 공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이스라엘은 바알신앙을 따라 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이 대접받는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사사기 말미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레위인이 집안의 노예로 취급을 받았고 레위인 역시 아내로 집단 성폭행으로 죽임을 당했을 때 온 나라를 전쟁터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마지막 말씀인 21:25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자기 소견의 옳은 대로..사는 것이 이방민족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게 한 것입니다. 사시기가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 시대에 교회가야 하는 길은 초대교회공동체가 했던 나눔과 섬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상생하고 공존할 줄 아는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바알신앙이 주는 마귀의 거짓말은 부자가 되면 평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코로나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진노요..하나님의 통치는 상생과 공존의 교회공동체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사시대를 통하여 오늘의 우리 삶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저는 여러분이 축복을 받고 생명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십시오. 교회공동체로 상생과 공존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라고 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한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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