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36:11-14 "예루살렘, 영적으로 몰락하다" 한남제일교회 고노아목사 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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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남제일 작성일23-05-06 16:44 조회4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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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7 주일예배 

 

<2부 11:30> 


가스펠프로젝트 구약 5-12

설교자 : 고노아 목사​
제목 : 예루살렘, 영적으로 몰락하다
본문 : 역대하36:11-14

11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 동안 다스리며 
12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으며 
13 또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그의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였으나 그가 왕을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14 모든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하여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따라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룩하게 두신 그의 전을 더럽게 하였으며


230507 한남제일교회 고노아목사
가스펠프로젝트 구약5-12

“예루살렘, 영적으로 몰락하다”(대하36:11-14)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18:16)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어린 아이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자기자신이 맘에 안든다고 다시 태어나 처음부터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반복적으로 양육하며 우리 공동체는 새롭고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에서도‘어리다’라는 단어가 원 의미로는 ‘어리석다’‘남의 말에 휘둘리다’‘부족하다’라는 의미 어리다라고 사용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이 또한 하나의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라는 용어로 ‘어른이’와 동격인 ‘어린이’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나이를 불문하고 하나의 인격으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른 또한 어린아이의 순수함처럼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우리 또한 계속 자라나야 한다는 상기시켜 줍니다.
 교회의 신앙양육의 목표는 어린이를 좋은 어린이로 길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길러내는 것이 신앙 양육입니다.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정체성은 제사장이자, 왕이자, 선지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앞으로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길러내는 얼마나 존귀한 섬김입니다. 우리 청소년교회 선생님들너무 감사드리며 그 사역 감당하심에 충만한 능력주실줄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장차 제사장, 선지자, 왕의 사명을 감당할 청소년교회 학생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담임목사님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중입니다. 성경의 땅들을 다녀오고 현장에서 예수의 복음을 묵상할수 있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집니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더 좋은 점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행을 잘하고 나면 집의 소중함을 매우 잘 느낍니다. 집에서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평안함을 느낍니다. 저도 시골집만 다녀와도 한남대교를 넘어오면서 남산 자락이보이면 그렇게 마음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와 집이다. 이제 쉴 수 있다. 무사히 다녀와서 참 감사하다. 그 평안함과 더불어 조금 쉬고 나면 또 하루를 살아갈 더 큰 힘이 생깁니다.
 [잠4:23]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다
 여행의 목적은 여행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돌아온 후에 마음의 상태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신앙교육은 마음을 지키는 훈련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유대 왕국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마음에 받아야 하는지 다시 깨닫게 합니다.

첫째, 영적인 몰락은 완악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대하 36:11-14)
- 마음을 지켜라 -
 성경 역대상하서는 포로기시대 후에 신앙적 관점, 제사장적 관점에서 역사를 다시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신앙훈련을 할 때 가장 먼저 읽게하는 성경이기도 합니다. 
 유대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의 북쪽 성벽 아래를 자그마한 구멍하나가 나옵니다. 그 구멍에는 ‘시드기야 동굴’그리고 ‘솔로몬의 채석장’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축구장 4개정도되는 커다란 동굴이 나옵니다. 솔로몬 당시 예루살렘성을 건축할때 엄청난 양의 벽돌이 필요했지요. 그때 벽돌을 채석한 후 생긴 동굴입니다. 그 동굴에서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피해 이 시드기야 동굴로 잘 도망하였으나 여리고 평지에서 잡혀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시드기야는 왜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요? 성경에서는 시드기야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12-14절에 “악을 행하는자, 겸손하지 않는자, 목이 곧은자, 이스라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자”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의 중심을 먼저 보셨습니다. 무엇을 하였는가를 업적을 평가하기보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였는가를 평가했습니다.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눈을 보면 압니다.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저는 사실 눈빛으로 더 많이 대화하는 편입니다. 마음이 유연한 사람, 겸손한 사람은 눈빛부터가 다릅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그럴 수 있지요. 좋은 말씀 참 감사합니다.”라는 하는 반응은 대화를 통해 관계를 참 좋게 만듭니다. 유연한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그 행동과 말에서 그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어떠한 말과 행동에서도 반응 리액션이 없게 됩니다.
 사람간에 대화에서도 이러한 반응과 태도는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다른 조건에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완악하다라는 단어는 개역한글에거는 강퍅하다로 번역되었던 단어입니다. 기본어근으로는 ‘달라붙다’‘잡다’‘묶다’‘강화하다’의 의미를 가집니다. 단어 자체는 문제가 없는 것 같아 보이나 그것이 인간의 마음에 사용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그의 마음이 딱딱하다는 것입니다. 시험문제에서 출제자의 의도는 아무 상관없이 내 마음에 판단대로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 완악하다는 단어는 바로에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모세의 출애굽요청에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딱딱하여. 내가 판단할땐 분명히 아니니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가진 세상적인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고 내 마음대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이라고 하면 이미 선악과로 시작된 인간의 판단이 하나님을 제한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은 너무 교만하여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도 인간의 영적타락은 그 명령조차 판단하려는 마음입니다. 마가복음10:15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이 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자리가 없는 것 자체가 죄라 하는 이유입니다.  

둘째, 영적으로 몰락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게 됩니다(렘 38:14-18, 24-28)
- 정직해야 합니다 -
 이스라엘이 그 큰 강대국 느부갓네살의 바벨론이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하나님은 이 시드기야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21세의 왕이되어 11년 동안 이스라엘 통치하는 시드기야의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반응을 보셨습니다.
 시드기야는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을 지키고자 바벨론을 견제하기 위하여 애굽을 의지하고 그 힘을 빌리려 많은 애를 썼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길 잔인하고 포악한 바벨론과는 결코 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애굽은 바벨론의 힘에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게 됩니다. 바벨론으로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시드기야도 두 눈을 뽑혀 바벨론으로 잡혀가 죽을때까 감옥에 살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몰락하며 그 인생에서 더 이상 하나님은 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수차례 말씀하셨습니다. 17-18절의 말씀입니다. 17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당하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18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시드기야는 지금 이스라엘을 멸망을 자신의 손으로 막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말합니다. 시드기야 생각에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잔인무도한 바벨론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둘수 없을 것이라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막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불편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상대의 기분을 상하는 것을 참 나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말 3단 콤보가 있다고 합니다.“있잖아,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그래도 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야”. 잔소리는 시작도 안했지만 이미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 나쁘게 되어 더 이상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참 착합니다. 예의도 잘 지키고 배려심도 많고 인상도 참 좋습니다. 불편한 말도 잘 안합니다. 관계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그들을 살릴수는 없습니다. 평시와 전시는 달라야 합니다. 평범한 복을 누리는 상태와, 전도하는 상황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종종 “맞아맞아”라고 리액션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반응은 대화가 단절된다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에 ‘맞다’라는 판단을 하게 되어 더 이상 깊은 대화를 할 수 없고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은‘네 말이 맞으니깐 그만해’로 들릴 수 있으며 나는 상대방의 말을 동의해 버린 상황이 되는 오해가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분에 맞춰 복음을 제한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3중직을 보게 되면‘선지자’또는 ‘예언가’로 그 직분을 말합니다. 선지라는 말은 먼저 선(先), 그리고 알 지(知)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전하는 대언자를 말합니다. 예언가는 미리 예(預), 말씀 언(言)의 한자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앞의 일들을 미리 대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시말하면 이 선지자는 자기의 말을 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 앞으로의 일을 미리 대신 전하는 자입니다. 신명기4:2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로마서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듯이 이 말씀의 주체자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되십니다.
 전도는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닌 하나님이 주체자가 되는 말씀입니다. 비전이라는 단어 또한 사람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며,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시는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정직해지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생각과 동일하게 판단하지 않았는지. 나의 상황과 판단에 따라 제한하지 않았는지 정직해기 원합니다. 정직하게 주님의 말을 전하는 우리 영혼에 주님은 모든 불의와 저주에서 건져 주심을 믿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영적인 몰락에 진노하십니다(대하 36:15-21)
- 하나님은 남은자를 구원하십니다 -
 한 블랙박스 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8차선 도로에 녹색신호등에 불이 들어왔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횡단보도를 막아서는 것입니다. 뒤에서 차들이 빵빵거립니다. 그런데도 오토바이는 그 길을 막아서고 천천히 지나가는 겁니다. 분명 그 행위는 교토법규를 위반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오토바이 옆에 보행자 신호가 끝났는데 아직 지나가지 못한 할머니 한분이 건너고 계셨던 것입니다. 참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장면이었습니다. 사람은 법의 판단으로 그 목적을 판단할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전히 오토바이가 위험할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만 자신의 위험을 무릎쓰고, 신호를 위반해서까지 더 위험에 처해있는 어르신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모습은 매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유대 왕국의 시드기야의 사로잡혀감과 예루살렘 성, 성벽, 성전이 무너지는 불타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성전에서 청년들은 죽었고 노인과 병약한 사람도 긍휼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그릇들, 귀한 보물들도 다 바벨론에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마지막 단락을 보면 “20 칼에서 살아 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의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르니라 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하나님은 그 백성에 대한 진노를 영원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깨달을 수 있을 때, 그들이 돌아올 수 있는 그 상황까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선지자의 말을 멸시하는 자의 결말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구원의 길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남은자 사상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한자, 마음을 어린아이와 같이 열어두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지키는 자에게는 약속대로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와 같이 그 상황은 망한 것 같고 내 생각으로는 안된다고 판단 된 그 때, 하나님은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하십니다. 
 남은자는 이스라엘 땅에 남아있는 자가 아닙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던 자들이며, 그곳에서 모진 고통과 박해를 견뎌낸 자들입니다. 오히려 버려졌던 이스라엘의 땅은 70년동안 안식을 누렸고 다시 세울 수 있는 회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이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던 예수님께서 눈물 흘리며 안타까워 하던 여인들을 위해 말씀하십니다. 눅가복음23:28에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하십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는 눈물로 주님의 자녀를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를 믿는 선생이 되었으니 먼저 그 말씀앞에 정직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든 교회가 회복되고 그 마음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며 주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이런 교회가 우리 교회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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