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3:22-30 "예수님과 세례 요한"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2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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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남제일 작성일23-10-07 13:53 조회372회 댓글0건

본문

231008 주일예배  

 

 

<3분 설교 |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겸손하십니까?>

 

<3분 설교 | 우리는 창문>

 

​​

 

가스펠프로젝트 신약 1-9

설교자 : 오창우 목사​
제목 :  "예수님과 세례 요한"
본문 : 요한복음3:22-30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예수님과 세례 요한”(3:22-36)

 

 

오늘은 세례요한의 전도, 전도자의 겸손이다. 오늘 주제는 전도자 세례요한의 겸손이다.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을 전도하는 것을 통해 요한 자신의 존재를 확인했던 것이다. 당시 세례요한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모든 사람들이 와서 회개의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시작하시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이 때 세례요한의 태도이다. 세례요한의 제자가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로 가서 세례를 받는다고 하자 세례요한은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면 세례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경쟁의 상대가 아니다. 겸손하게 예수의 증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져야할 존재감은 겸손함의 전도이다. 겸손함의 전도란 무엇인가?

 

첫째, 세례요한의 사명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3:22-28)

“22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전도자의 겸손함의 첫째는 사명앞에서의 겸손이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에서 전도자의 겸손이 시작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은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했다. 세례요한은 사명자의 축복을 가졌고 그 사명이 그로 겸손하게 한 것이다. 지금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서로 다른 곳에서 세례를 주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인기가 많았던 세례요한보다 지금은 예수님이 더 인기가 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사람들이 다 그에게 갑니다.”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례 요한의 태도를 보라.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예수가 하는 일의 권위는 하늘에서 주신 일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할 자는 너희니라.”(28) 예수님을 경쟁상대로 여기기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더 집중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세우셨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니다. 그래서 사도의 시비가 있었다. 그럴 때 마다 항상 하는 말은 나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핍박이 오고 죽음의 위협이 올 때마다 바울사도는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집중하는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11:11)라는 인정을 받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주신 사명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세례요한이기에 극찬을 받았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 앞에 겸손할 수 있는가

 

오래 전에 미국 지방신문에 소개됐던 이야기이다. 어떤 분이 회사의 전무가 될 정도로 승승장구하다가 그만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 조금만 더 잘 되면 부사장에 사장까지 될 수 있었는데 그만 재수 없이 반신불수가 되었으니 불평원망이 하늘을 찌른다. 매일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자신의 신세타령을 하면서, 짜증과 불평불만으로 옆에서 수발을 드는 부인조차 견딜 수가 없었다. 아내는 물론 가족이 다 떠난다. 친구들은 물론이다. 불평원망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에게 누가 가까이 할 수 있겠는가? 예수 믿는 친구가 찾아와 기도를 해주고 감사의 조건을 찾아보라고 하는 말에 왠지 감동이 왔다. 처음에는 감사할 조건이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기에게 도움을 준 사람도 별로 생각이 나지 않았고, 그저 짜증만 났고, 부인도 자식도 친구들도 고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노력해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가슴 속에, 뭉클한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생각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 그렇게 공부를 잘 하지 못했는데도, 늘 담임 선생님이 칭찬을 잘 해주어서, 용기를 얻어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었고, . 고등학교와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취직하여 회사의 중역까지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고, 어릴 적 그 선생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는 여기 저기 수소문해서, 그 선생님이 계신다는 양로원의 주소를 찾아, 간단한 편지를 썼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는 윌리인데, 지금 반신불수가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생애에 있어서 둘도 없는 은사입니다. 그동안 한 번도 감사의 글을 드리지 못하고, 무심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중략이 선생님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홀로 양로원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편지통에서 이 편지를 받아 읽게 되었고, 너무나 기쁘고 고마워서 답장을 썼다.“사랑하는 윌리군! 내 평생 수많은 어린이를 가르쳤지만, 고맙다고 감사편지를 써 보낸 제자는 자네밖에 없었네. 이제는 늙어서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이 노친네를, 자네는 참으로 행복하고 기쁘게 해주었네! 내가 자네의 편지를 눈물로 읽은 것을 아나? 나는 자네 글을 침대 옆에 놓고 매일 밤 한번 씩 읽는다네! 그리고 읽을 때마다 그 편지를 어루만지면서 자네에게 감사하네! 이 편지가 내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 아는가? 내 생애 새로운 희열과 기쁨을 용솟음치게 해 주었네. 나는 자네편지를 내 교편생활의 유일한 보람으로 알고, 내가 죽는 날까지 간직하려 하네!자네의 건강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 그대의 선생 000”제자는 선생님이 보내주신 감사의 편지를 읽는 순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을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삶의 용기를 찾았다. 걷는 연습을 했다. 말하는 연습을 했고, 재활운동에 사력을 다한 결과, 건강이 점점 좋아졌고, 다시 직장에 복직하게 되었다. 부사장이 되고, 사장이 되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단순히 감사하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불평원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늘을 보지 않아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생각하지 않아서 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신 사명이 다 있다. 몸이 아프면 아픈 대로 사명이 있고 건강하면 건강한대로 사명이 있다. 나이 들면 든 대로 젊으면 젊은 대로 사명이 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사명이 있고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사명을 가지고 학생에게 칭찬으로 용기를 주어 공부도 열심히 하여 우등생도 되고 회사의 중역까지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 뿐인가? 제자의 감사편지를 받은 선생님은 또 사명을 가지고 병든 제자에게 용기를 주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병든 제자역시 감사하는 일을 통해 사명을 감당함으로 선생님에게 살아갈 수 있는 보람을 주었다. 이런 사례야 말로 사명 앞에서의 겸손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으로 겸손하기 위하여 비교하고 차별하는 세상을 이겨야 한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2:3에 말씀하시기를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하셨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 즉 사명을 찾아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활용하는 것이 삶의 지혜이고 축복이다. 세례 요한은 자리가 낮으냐 높으냐, 인기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오직하나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에의 만족과 충성일 뿐이다. 전도자의 겸손 첫 번째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사명에 충성하는 것이다. 이런 사명으로 사는 겸손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둘째, 세례요한의 태도는 겸손이며, 그리스도를 기뻐합니다.(3:29-30)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전도의 겸손함의 두 번째는 그리스도, 구원자 앞에서의 겸손이다. “그리스도만을 기뻐하는 것이다. 앞에서 세례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이다. 구원하실 그리스도 앞에서 당연히 겸손하여 주님이 일하실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신랑 되신 예수님의 친구라고 했다. 신랑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에서 기쁨이 충만하다고 했다. 유대 나라에서 신랑의 친구는 혼인식에 있어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신랑의 친구는 결혼식도 마련하고, 초청장도 보내고, 모든 결혼식을 주재했다. 낮에 찾아오는 하객들을 신랑 친구가 맞아 대접을 했다. 또한 신랑의 친구는 신부의 방을 지키는 것이었다. 혹시 엉뚱한 사람이 신부 방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이 깊어 신랑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제일 먼저 달려가서 반갑게 맞이하는 것도 신랑 친구이다. 친구는 신랑을 안내하여 신부가 있는 방까지 가서 방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만나게 될 때, 이 모습을 보고 기뻐하면서 그 곳을 떠나갔다. 이스라엘은 신부이며,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신랑이시다. 세례 요한 자신의 사명은 신랑의 친구로 보았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유대인의 결혼 풍습에 비유하여, 자신은 예수님과 이스라엘이 함께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한 후 그의 사명이 완성됨을 알고 그는 사라져갔다. 그러면서하는 말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했다. 예수님만 높이고 자신을 낮춤으로 예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운 썬다싱은 일찍이 한 사람의 병사자를 위해 기도했더니, 이튿날 아침에 그가 다시 살아나 건강을 되찾았다. 그러자 그 고장 사람들은 썬다싱에게 신비한 초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받들어 모시려고 했다. 썬다싱이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그 후부터 그는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하지 않기로 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성경에도 쓰여 있으며, 따라서 신유의 은사를 나타내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썬다싱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는 것이 두려웠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쏠리기를 원했다. 무색투명한 유리는 자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그대로 보여 줄 수 있다. 자기 과시는 야비한 품성의 특징이다. 자기는 사라지고 진선미의 결정인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생애야말로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이므로 나는 기뻐한다.”고 하면서 죽는다고 해도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인도의 선교사 윌리암 캐리는 마지막 눈을 감을 때 여러분 내가 죽거든 윌리암 캐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윌리암 캐리라는 말 대선에 월리암 캐리의 주님에 대해서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유언하고 하늘나라 갔다. 장로교의 창설자인 요한 칼빈도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해서 무덤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전도자로 세상을 향해 증거 할 겸손함은 바로 예수로만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주간에 신문기사에 보니 여자청년 한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 슬픔에 빠진 유가족들은 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장기기증을 통해 여러 환자들의 생명을 살렸다는 아름다운 신문기사이다. 아직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과 참으로 우리 백성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새 생명을 주셨다. 예수만이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로 새 삶을 살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은 어떤가? 저는 기도한다. “주여, 저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구원받는 사람이 많아지게 하소서!” 여러분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진정 예수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할 수 있는 전도자의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리스도만을 높여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한남제일교회가 가질 기쁨은 우리 한남제일의 성도들을 통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으로 구원받고 높여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는 쇠하고 예수는 흥해야 한다는 세례요한의 겸손함이다. 우리에게 나로 예수만 흥하는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셋째,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경고와 증거로 가득했습니다. (3:31-36)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전도의 겸손함의 세 번째는 복음 앞에서의 겸손이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경고와 증거이다. 세례요한은 복음의 진리를 전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있다는 경고와 증거이다.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겸손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이신 예수를 믿고 순종함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 앞에 겸손하여 경고와 증거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전도자가 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겸손함이다.

 

여러분에게 전도는 무엇인가? 우리의 사명은 내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명이다. 우리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우리가 내 자신도 살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살린단 말인가?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의 사명은 그러한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도록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사용하사 예정된 자를 부르신다.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자들이 구원으로 예정 받은 자라면 그들은 반드시 돌아오고, 예정 받지 못했다면 복음을 거절할 것이다. 고후 2:15-17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우리가 복음을 정확하게 전할 때 두 가지의 일이 일어난다.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은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고, 망하는 자들은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른다. 이것이 참된 전도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전도란 예정된 자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 들여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고, 예정 받지 못한 자로 하여금 복음을 거절하여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작업이다

 

우리의 전도의 문제는 자기 자랑에 있다. 내가 교회에 나갔더니 건강해 졌고 사업이 번성했으며 자녀도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니 교회에 나가시라! 자랑할 것이 없으니 전도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전도는 무엇인지 아시는가? 전도는 헬라어로 선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저 선포하는 것이 전도이다. 세례요한은 죄의 심판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영생 얻을 것은 선포했다. 오직 복이나 천국, 축복이나 형통 등의 말로만 사람들을 꼬시려 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다! 죄를 이야기 하지 않고 어떻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나? 심판을 이야기 하지 않고 어떻게 공의의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나? 지옥을 이야기 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의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나? 죄와 심판과 지옥이 없으면 예수님도, 십자가도, 부활도 필요 없다! 죄와 심판과 지옥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이다. 고로 이 모든 것을 하나도 가감하지 않고 다 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인 것이다. 이렇게 전도의 선포를 해보라! <1)당신은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이기에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2)그러나 당신을 심판하기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당신의 죄를 담당케 하셨고, 당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으며, 당신을 대신하여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하셨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삼일 만에 부활시키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게하심으로써 당신의 부활을 예비하셨다. 3) 당신은 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받는다. 그러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주되심과, 성자되심을 믿으라! 은혜의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실 것이다!> 다시한번 더 말하지만 성경은 우리더러 죄인을 구원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딤후 4:2의 말씀처럼 오로지 하나다.“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세례요한은 전도자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분명하게 전한 경고와 심판을 선포함으로 진정한 겸손함을 드러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다. 전도자 세례요한은 3가지의 겸손하게 전도했다. 사명 앞에서의 겸손, 그리스도 앞에서의 겸손, 그리고 복음 앞에서의 겸손 이 3가지의 겸손이다 바로 우리가 가져야할 겸손이다. 특히 교회의 직임을 맡은 이들이 가져야 할 겸손인 것이다.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 3개월을 전도의 달로 정했다. 10월은 기도의 달, 11월은 전도의 달, 그리고 12월은 정착의 달이다. 그런데 전도대상자를 작정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다. 우리 교회에는 차를 5번이나 갈아타고 오시는 분도 있다. 어느 교회는 부산에서도 온다고 한다. 멀고 가깝고 의 문제로 전도할 것을 사전에 차단하지 말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작정하고 기도하고 전도하자 정착의 비전도 가져보자. 우리는 새 예배당 건축을 위해 이곳 기독교연합회관에서 잠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름 하여 광야한남제일교회이다. 반드시 부흥하고 영적 성장하여 새 예배당에 입당해야 할 것이다. 전도자 세례요한의 겸손함의 신앙으로 승리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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