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21-35 "무자비한 종 비유"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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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남제일 작성일23-11-18 17:18 조회1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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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9 주일예배 안내

  

<3분설교 | 하나님의 용서 없이는>

 

<3분설교 | 너도 용서하라>

<3분설교 |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

 

<1부 10:00>

 

가스펠프로젝트 신약 2-2

설교자 : 오창우 목사​
제목 : "무자비한 종 비유"
본문 : 마태복음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231119 가스펠프로젝트 신약 2-2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무자비한 종의 비유”(18:21-35)

 

오늘은 총동원전도주일이다. 총동원 주일을 통해 교회 외의 다른 분들에게 교회공동체가 어떤 곳인가를 보여 주는 기회이다. 그렇다면 교회공동체는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인가?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이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간단하다. 어떤 임금에게 신하가 있었는데 임금에게 빚을 많이 졌다. 일만 달란트라고 하니까 오늘로 말하면 60조라니 엄청난 돈이다. 자신이나 아내가 자식까지 팔아서 갚으라고 했지만 할 수 없는 빚이다. 갚겠다는 신하를 보면서 긍휼히 여긴 임금이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임금은 탕감 받은 신하의 탕감 받은 후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났다. 왜 화가 났을까? 임금의 자리는 권력을 가지고 나라와 백성을 잘살게 하기 위한 바르게 다스린다는 뜻을 가진 말 그대로 정치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하의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해 줌으로 서로의 빚도 탕감해 주는 등 더불어 잘 살기를 원했다. 그런데 큰 빚의 죄를 용서받은 신하는 100데나리온, 오늘로 말하면 1000만원 정도의 작은 빚의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다. 멱살을 잡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래서 임금은 화가 났던 것이다. 다시 신하를 불렀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3) 임금의 뜻은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며 살라는 것이다. 결국 은혜를 모르고 용서할 줄 모르는 신하를 감옥에 가두고 빚을 갚게 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35) 그렇다. 용서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나라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나 아니 교회공동체는 어떤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가? 성경에는 주님이 오시면 사자와 양이 같이 뛰놀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집어넣어도 해함이나 상함이 없는 세상이 된다고 하셨다. 실제로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을 받고 용서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가난이 배우지 못함이 힘이 없다고 비판하고 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한 것을 나누어 가난한 자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이 날마다 이루어졌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들은 과연 성경처럼 살고 있는가? 요한 계시록의 하나님 나라도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으로 살고 있다. 오늘 우리가 같이 나눌 말씀은 우리가 이룰 천국공동체이다. 예수님은 용서하는 공동체의 기쁨을 말씀하신다. 이 땅에서 우리는 용서하고 살아가는 기쁨이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용서한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노력을 말씀하셨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의 용서를 해야 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하셨다. 마태복음 18:18의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매면 매이고 내가 풀면 풀린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대단히 무섭게 생각한다. 나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범하면 가서 권고하라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으로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처럼 여기라고 하셨다. 이렇게 형제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십계명 설교하시는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십계명은 다 안 지켜도 된다. 그런데 11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11계명이 무엇인지 아시는가?“네 죄를 들키지 말라!”란다. (하하) 웃자는 말이다. 세상에 하나님 앞에서 들키지 않는 죄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다 죄인이다. 찰스.크래프트목사님의 말이다. 쓰레기가 있는 곳에는 쥐가 꼬여 들 듯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상처들, 즉 미움, 원망, 원한, 증오, 분노, 용서 못 함 등의 쓰레기가 있으면 그 쓰레기 속에 귀신들이 자리 잡고 여러 가지 문제와 고통을 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은 용서할 것도 없고 용서받을 것도 없는, 사람들과 원수진 일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으로는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고, 등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 생각을 읽으시는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갈라디아서 6:7을 보라. 스스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셨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은 용서할 것도 없고 용서 받을 것도 없는, 사람들과 원수진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비웃는 교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죽음과 지옥의 형벌을 용서받았다. 일만 달란트와 같이 갚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자이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당연히 죽음에서 살리신 은혜를 감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스라엘이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강령이 들림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아야 하는데 살아낼 수 없는 죄인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하다. 여전히 죄 속에 살고 있고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가 있어야 살 수 있다.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을 생각해 보라. 영생을 얻기 위해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신만만했을 때 주님은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부자 청년은 근심하고 떠났다. 제자들도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반문했다. 이 세상의 누구도 부자 청년보다 나을 수 없다. 구원받을 만한 선한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하셨. 바로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감사 또 감사할 뿐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누구도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없이 구원받아 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남을 용서할 만한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는 여전한 죄인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서는 자만이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신다. 남의 죄는 물론 나의 죄를 위해서 그리고 용서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사람 앞에서의 용서를 해야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용서에 대한 질문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는 용서할까요?에 대하여 일곱 번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21-22) 우리의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죄로 보고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사람을 통해 확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심했던 때의 이야기이다. 한 백인이 자기 집 정원 앞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때 남루하고 몹시 피곤해 보이는 한 인디언이 지나가다가 그 신사에게 빵을 좀 달라고 애걸했다. 백인은 인디언을 천시 여기면서 너에게 줄 빵이 없다고 말했다. 물도 맥주 한 모금도 주지 않으면서 개 같은 인디언이라고 비하했다. 인디언은 슬픈 얼굴로 돌아갔다. 얼마 후에 이 백인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 날이 어둡고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인디언이 그를 구출해서 자기 집으로 안내하며 후히 대접했다. 백인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를 구출한 인디언은 바로 얼마 전에 자기가 박대했던 그 인디언이었다. 백인은 너무 어이가 없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였다. 그런 백인에게 이 인디언은 조용히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얼마 전에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을 대했다면 지금쯤 당신은 산중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감동시키며 감복하게 한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25:21-22) 그렇다. 하물며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떠해야 하는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믿는다는 것은 거짓이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형제의 죄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의 죄도 용서해 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셨다. 죽음으로 용서하신 것이다. 오래전에, 우리 교회 목사님 한 분이 정상적으로 일 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운동하시다가 그만 목의 신경을 다쳐서 목 아랫부분은 장애를 입으신 것이다. 연세가 있으신 장로님들은 제가 함께 살면 좋겠다는 말에 동의하셨고 대부분은 모시는 것이 옳다고 하여 잘 섬겼다. 강대상을 옮겨 놓고 앉아서 설교도 하시고 찬양도 은혜롭게 부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며칠 전에도 어떤 모임에 갔더니 어느 목사님이 장애 입은 목사님을 섬겼던 일에 대해 칭송을 한남제일교회는 대단하다고 하셨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분들이 이야기를 듣더니 이구동성으로 그런 교회는 없다고 하더니 한남제일교회는 세계교회 역사에 남을 참 좋은 교회라고 해 주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옳지 않다는 분의 주장도 있었다. “무노동 무임금입니다!” 몇 분이 함께 교회가 바르지 않다고 하여 떠났던 아픔도 있었다. 이분들을 비난하자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은 만나고 찾아간 신앙공동체는 다 옳을 수 있을까? 반문해 본다. 결코, 아닐 것이다. 그곳에도 사람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가 있을 것이다. 성경은 물고 뜯고 하기(5:15) 보다는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딤전4:4) 고 하셨다.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는 어떤 잘못이나 부족한 것이나 모순이나 위선자를 발견했으면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이나 상황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다. 그리고 반면에 나에게도 잘못된 점은 없는가? ‘내가 너무 편협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는 등으로 남의 문제를 통해 나의 잘못된 점을 나 스스로 볼 수 있도록 거울의 역할을 하게 하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소자, 즉 소외되고 보잘것없는 한 사람까지도 귀하게 여기시고 찾아다니셨다. 버림받은 자들, 각색 병자들, 지역적으로 또는 신분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셨으며 그들을 고치시고 도우시고 구원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해관계를 따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하고, 판단하여 실족시키고 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고 뜻이 다르고 생활방식이 다르면 정죄하거나 편을 갈라버린다. 작은 이해관계 때문에 등을 돌리고 경멸하고 무시해버린다. 자신이 조금 더 편하고, 자신의 욕심을 조금 더 채우려고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불이익을 당하게 한다. 자신이 소중하고 자신의 가정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도 소중하다는 것을 잊고 있다. 이런 일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이로 인하여 실족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살리고 구원하러 오셨는데 사람들은 서로 평가하고 선을 긋고 분리해버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므로 혼자서는 신앙이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춰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 자매와 형제들이 필요하다. 물론 끝없는 용서 역시 필요하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다. 나에게 축복을 줄 대상이다. 그렇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어지는 구원을 이루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공동체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그 잘못을 용서해야 하는 사람 모두를 위한 공동체이다. 용서를 매개로 하는 관계 자체가 교회공동체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3) 너희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너희는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4:32) 예수님의 용서하는 삶을 따라야 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일이다.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아닌가? 폐지를 주워서 수레에 싣고 가는 할아버지를 보고 한 아이 엄마가 하는 말이 너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폐지나 줍고 산다고 했단다. 세상에 가난해지고 싶어서 가난해진 사람은 없다. 가난할 수밖에 없는 형편도 있을 수 있다. 장애를 입고 싶어서 입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세상은 가난한 사람을 비판한다. 부족한 것을 정죄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교회공동체는 비판이 아니라 용서하고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다. 우리 교인 중에 고인이 된 이재룡 씨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이들은 재룡 아저씨라고 불렀다. 장애가 있는 분이었지만 그분의 사랑은 본받아야 한다. 월드비전에서 북한의 가난한 동족들을 돕기 운동을 한창 할 때이다. 교회는 자선음악회를 하기도 했고 작은 저금통으로 모금을 했다. 그런데 재룡 아저씨는 장애인의 몸으로 작은 저금통을 일주일에 한 번씩 채워가지고 왔다. 족히 10개가 넘었다. 남들은 하나도 하기 힘든데 10개씩이나? 알고 보니 길거리에서 재활용품을 주워가지고 팔은 동전을 모았단다. 우리 동네는 24시간 영업을 하기 때문에 유동인구가 많았다. 새벽에 저 멀리 한 바퀴를 돌면 빈 깡통들이 나오는데 그걸 새벽마다 주웠다 팔아 모았다는 것이다. 나보다 어려운 북한의 가난한 동족들을 위해서 월드비전에서는 특별상을 주셨다. 직분도 없는 재룡 아저씨에게서 예수님의 사랑의 용서를 보았다. 재룡 아저씨가 그립다. 이제 저의 목회가 일 년 그리고 1달여밖에 남지 않았다. 제가 올해 칠순인데 아이들이 저보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한다. 그래서 나의 가족은 교회이다. 그러니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싶다고 했다. 떡을 해 줬다. 장학헌금을 할 수 있게도 해 주었다. 여러분이 기도로 사랑으로 키워주신 자녀들이 한 일이기에 더 감사하다. 사도바울이 원하는 교회공동체역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6:2)이다. 우리가 서로의 짐을 지기 위해 나누면 좋겠다.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고후2:10) 나누면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 한 일이다. ()+()=+ 라는 그림이 있다. 빼기와 빼기를 합치면=더하기 라는 의미이다. 첫째 빼기=하나님과 관계이다. 기도할 때 내 힘을 빼는 겁니다. 기도할 때 내 힘을 고집하면 혼자서 잘 놀고 있는 것이지만 .내 힘을 빼면 성령님과 교감 할 수 있다. 둘째 빼기=인간관계 이다. 말할 때 내 생각()을 고집하면 사람들이 싫어한다. 내 힘을 빼야만 상대방과 교감할 수 있다. 이래도 응, 저래도 응, 줏대없이 휩쓸리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진 가치관, 또는 공동체가 달성해야할 목적 안에서 포용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 것을 빼면 하나님과도 가까워지고, 사람들과도 가까워진다. 때로는 고마워요. 감사해요보다

미안해요 한마디가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5:16)하셨다. 한남제일교회가 가진 위대한 유산은 용서를 넘어서서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선교하는 예수공동체 한남제일교회 아닌가? 예수님께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라고 하신다. 더 사랑을 연구하고 실천하자! 선교하는 예수공동체 한남제일교회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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