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25-37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2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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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남제일 작성일23-12-02 18:49 조회1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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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3 대림절1주 주일예배

 

 

<3분설교 : 지식과 행위의 함정>

 

<3분설교 : 우리는 강도만난 자>

<3분설교 :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

 

​​

 

 

가스펠프로젝트 신약 2-3

설교자 : 오창우 목사​
제목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본문 : 누가복음 10:25-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231203 대림절1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10:25-37)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일이다. 대림절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 성도된 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일 것이다. 한 율법사가 찾아와 예수님께 찾아 왔다. 그리고 질문한다.“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냐?”하지만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는 것을 보아 율법사는 누구보다 영생을 얻은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율법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이처럼 율법사는 하나님의 율법을 두 개의 문장으로 확실하고 자신있게 말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의 대답대로 행하면 살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생겼다. 율법사가 반문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이 질문에서 예수님은 율법사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비유이다.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강도만난 자를 보고도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 중에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는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 붓고 치료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가서는 주막 주인에게 보살펴 달라고 이틀 치 품삯의 돈을 주면서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는 나머지 비용은 자기가 돌아 올 때에 지불하겠다고 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물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율법학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리하면 살리라!”하셨다. 과연 율법사는 자비를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자비를 베풀며 살았을까? 의문이 든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 자선을 베풀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는 그 보다 더 깊은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강도만난 자는 누구이며 자비를 베푼 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첫째, 강도 만난 자는 다름 아닌 율법사 자신이다.

강도 만난 자, 내버려 두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는 누구인가? 율법학자는 자신을 누구든 도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의로운 자라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서 나는 이런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고, 언제든 남을 도울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선한 사람임을 증명하려 했다. 그 의도 앞에 예수님은 네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너는 네가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고 행위가 온전한 사람이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착각하지 마. 너는 너 혼자 스스로 구원할 수도, 일어나 걸어서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야라고 그의 정체를 폭로하고 있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오히려 본인이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었다. 이것은 비단 율법학자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비난받아 마땅해 보이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제사장과 레위인이다. 이 두 사람은 제사와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인데 이들이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하지 않는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사와 율법으로는 죽어있는 우리를 결코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종교심을 갖고 있어도,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결코 그것으로는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항상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라는 종교 생활을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율법의 의를 동원하면 구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그런 삶의 방식이 마땅히 구원을 이룰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으로는 결코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하셨다. 오늘을 사는 많은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늘 자신이 갑의 위치에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해냄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한다.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주관하여 주시고 도와주시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사람임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기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나의 가장 정확한 정체성이다. 우리는 모두 다 강도 만나 피 흘리고 있는 자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죄와 허물로 인해 죽은 자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임을 알 때 참 복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둘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이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거의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구원했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개 취급하며 경멸을 받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인이 죽어가는 유대인을 구원한다. 그것도 .유대 땅, 사마리아 사람들로서는 원수의 땅에서 구원한다. 이처럼 사마리아 사람은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도, 인정해 주지도 않는 땅으로 손수 걸어 들어가서 구원을 한다. 보다 자세히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먼저 찾아간 것이다. 죽어가는 자가 구원해 달라고 말할 힘도 없이 쓰러져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먼저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는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다. 그 뿐이 아니다. 주막에 데리고 가서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비용을 대신 전부 지불하고는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한다.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 주막주인에게 자신을 대신해 이 사람을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한다. 이 사마리아인은 누구의 모습과 같은가. 그렇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과 똑같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셨다. 안전한 하늘에서 위험한 땅, 고통의 땅에 오셨다. 죄에 빠져 죽어 있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셨다. 우리가 구원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오셔서 구원하신 것이다. 대속의 십자가로 우리가 치러야 할 모든 죄 값을 다 지불하셨다. 하늘에 오르시며 성령 하나님께 우리를 맡기고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셨다. 그렇다. 이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사마리아인. 지금 예수님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 면서도 죄로 죽은 자들을 치료하고, 아픈 상처를 싸매어 주셨다. 이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심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젠 변해야 한다. 성경에서 본래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는데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보고 해석하는 것은 더 이상은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단순히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율법사에게도 위기가 찾아온 것처럼 오늘의 한국교회 역시 위기가 찾아 왔다. 두 가지를 부탁을 드리고 싶다.

하나는 강도만난 자처럼 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바리새인들처럼 죄인들과 선을 확실히 긋고 살지 말라.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정죄하는 대상으로 삼고 자신만이 가장 옳은 것처럼 살았다. 우리는 어떤가? 비교의 대상이 예수로 바뀌어야 한다. 예수님은 의인이면서도 죄인들과 함께 했다. 세리, 창녀, 로마군인, 사마리아인, 각종 병자들을 죄인들이라고 거리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하셨다. 그리고 죄인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다. 그뿐인가? 안식일에는 바리새인들은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셨다. 배고픈 제자들로 하여금 밀 이삭을 따 먹게 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해석을 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사람을 살리기 위한 해석에 대하여 백성들은 열광을 했다. 수많은 죄인들, 정죄당하고 천시함을 받던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 중심으로 살아간다. 율법사가 그랬다. 한국교회가 그렇다. 끼리끼리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만을 상대하는 것이다. 나에게 도움이 되고 나의 품위를 올려 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등 철저하게 나 중심이다. 나 중심이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사람이 나의 도움으로 세워지고 더 행복해 질 수 있는 사람이 내 이웃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다. 거룩한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을 거룩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예수님처럼 죄인들의 친구인 교회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죄인의 친구이다. 교회가 죄인들의 친구가 되고 있는가? 죄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또 하나는 예수복음으로만 살자는 것이다. 요즘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가 성장이 멈추고 사회적 영향력을 점점 잃어버리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예수복음을 잃어 버려서 그렇다. 코로나 후유증만이 아니다. 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새로운 세대로부터 외면을 당하는가? 변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사회학적으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가 교회답지 않아서이다. 강단에서 예수복음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선포되기 보다는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라는 인간의 문제가 주를 이룬다. 기도에서도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 보다는 나를 도와달라는 등 인간이 주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선교적 교회라는 것도 복음이 없이 일과 사업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주님이 주신 말씀의 의미보다는 자의적으로 해석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구제에 너무 열을 올리는 등 복음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없는 메시지가 만발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착한 일을 해서 모범이 되는 것,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의 결과일 뿐이다. 복음은 죽어가는 나를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구원했고, 그 과정에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지금 가스펠 프로젝트 교재를 통해 성경을 공부하는 것도 이 교제가 강조하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이다. 제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삼중직 신앙을 강조하는 것도 다 복음으로 살자는 것이다. 사회의 변화 이전에 여러분 자신이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 제사장으로 예배하고 축복하고 선지자로 말씀을 배우고 기준으로 살고 왕으로 섬김의 리더십으로 진정한 리더가 되는 것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충격적인 것이 기독실업인회 사장들 모임에서 기독교인을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겠다는 그리스도인 사장들이 많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나?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것 같지만 교회 문밖으로만 나가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충격이다. 강도만난 자처럼 살지 말자 그리고 예수 복음으로 살자. 이런 삶만이 우리의 희망이고 승리이다. 그렇다. 지식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결국 구원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믿고 복음으로 구원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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