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21:1-17 "구원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2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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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남제일 작성일24-03-02 16:47 조회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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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3 사순절 세번째 주일예배 

 

  #shorts설교 | 오창우 목사 | 겸손함-내가 부족한 것을 인정

 

#shorts설교 | 오창우 목사 |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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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펠프로젝트 신약 3-2


설교자 : 오창우 목사​
제목 : "구원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본문 : 마태복음21:1-17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240303 가스펠프로젝트신약3-2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구원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21:1-17)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한 주간의 시작이다. 오늘은 두 가지 사건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하시는 것과 다른 하나는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 쫓으신 일이다. 주일과 월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다. 스가랴 선지자는 나귀타신 것을 보고 겸손하여 나귀를 타신 것이라고 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일인데 예수님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였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 바로 나귀를 타시기 까지이다. 예수님은 나귀를 따로 준비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에게 어느 장소에 가서 나귀 주인에게 주께서 쓰시겠다!”하면 불 것이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긴가민가 하면서 나귀 주인에게 주께서 쓰시겠다!”하니까 주인은 기꺼이 내어 주었다. 나귀는 오늘의 자동차와 같은 것인데 이렇게 내 줄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제자들은 놀랐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앞에서 겸손해 질 수 밖에 그래서 자기들의 옷을 벗어 예수님이 타실 나귀 위에 얹었다.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오시는데 자기들의 옷을 벗어 길 위에 깔았다. 종려나무가지도 깔았고 흔들었다. 승리의 백 말을 타고 오는 것이 아닌데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호산나”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소리쳐 맞이했다. 무리들의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제사장들이 크게 화를 내자 예수님께서도 무리들의 찬양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하셨다. 예루살렘 성이 일제히 소동했다고 했다. 그만큼 메시야에 대한 간절함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에 시달려 삶이 무척 고단했던 삶을 변화시켜 주실 것을 믿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기적과 능력으로 로마황제를 물리치고 이 땅에 이스라엘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했다. 이스라엘에 로마보다 더 큰 나라가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이스라엘의 꿈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다. 기적과 능력을 통해 하나님나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보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유대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다. 내 안에 하나님 나라이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 중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 주신 것이다.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제자들과 베드로는 늘 보았지만 앉은뱅이를 보고 성령에 의지하여 성전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지체장애자를 예수 이름으로 고쳐주었다. 몰려든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했다. 너희는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했다. “어찌할 꼬!”하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예수를 믿어야 죄 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설교함으로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삶의 변화가 일어났다. 성령하나님께서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이웃에게는 서로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으로 가난한 자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살게 된 것이다.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 사는 것이다. 같은 사람, 같은 시간, 로마제국의 압제를 받으면서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행복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사는 기쁨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세워진 하나님나라이다.

다음은 교만함의 사례이다.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 쫓으셨다. 장사꾼들은 자기 힘을 믿는 교만한 자들이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름이 아니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라는 종교지도자들이다. 이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보다 돈을 더 믿었다. 권력을 더 의지하여 로마와 결탁하기도 했다. 예수님은 이처럼 성전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돈과 권력 내 힘을 더 의지하는 자들을 내 쫓으신 것이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하셨다. 정말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은 강도였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반 세겔이라는 유대 돈으로 성전 세를 내야만 했다. 일반적인 통용화페인 로마 돈으로 바꿔야 했기에 환전상이 있었다. 또 하나님 앞에 나가 제자를 드릴 때에는 제물이 필요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 제물을 드렸는데 대부분이 비둘기를 찾으니까 비둘기가 많았다. 집에서 가져오면 정성은 있지만 대부분은 흠 없는 제물이라는 것을 판정하는 제사장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 하니까 성전 장사꾼들에게 구입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제물의 값이 시세보다 거의 20배나 비싸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환전상들의 상을 뒤엎으시고 채찍으로 쫓아 내셨다.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전하신다. 13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하셨다. 반면에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다. 예수님을 보고 성전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과 신체불구 장애인들이 찾아온 이들을 다 치유해 주셨다. 둘째 날, 예수님은 장사꾼을 내 쫓으신 후 성 밖 베다니마을로 가셨다. 이처럼 겸손과 교만의 두 사건을 통해서 겸손하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제자들과 무리들의 겸손한 믿음은 1)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역사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신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하셨다. 나귀를 타신 것도 무리들이 찬양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내 생각대로 믿는다든지 관습대로 믿는 것은 자기가 주인되는 교만한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대로 행하는 신앙생활이 될 때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다. 가보지도 않은 건너 마을에, 어떤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 나귀들이 묶여 있는 상황을 훤히 아셨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고 순종했다. 2)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믿음이다. 구원은 고통에서 절망에서 구원하여 소망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는 것이다. 구원하시는 예수님은 나에게 복을 주신다. 변화를 시키신다. 가정이 변하고 내가 변하고 직장이 변하고 축복으로 변하게 하시는 구원이 예수님에게 있다. 나귀타신 겸손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믿었다. 3) 예수님을 참 성전으로 믿는 믿음이다. 예수님의 몸된 교회에서는 치료가 있고 회복이 있고 기적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예배하는 분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할 때에 기적을 주시는 것을 보았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절망 중에 있던 분이 소망을 찾았다.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 예배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기적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예배해야 한다. 예수님은 참 성전이다. 겸손하게 주님께 나아가 엎드릴 때 주님은 응답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겸손은 낮아지는 것이고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자기를 비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젊은 수도자가 10년 동안 수도원에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노동도 열심히 했다. 오랜 노력에도 깨달음을 없었다. 낙담한 수도사는 스승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선생님, 아무리 애써도 깨달음이 없으니 저는 구제 불능 아닐까요.” 스승이 조용히 말했다. “자신이 구제 불능이라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큰 깨달음은 없다네.”자신이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를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비워야 새로운 것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비울 줄 아는 겸손한 마음과 자세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을 상실하여 받는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씀이 그래서 하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주님의 부름을 받아 최초의 선교사가 되어 1, 2, 3차 로마까지 전도자로 살았다. 교회에 편지를 보내서 신앙의 문제를 다룬 편지도 9개나 된다. 그런데도 바울사도는 자신이 구제 불능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법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했다. 아무도 건져 줄 수 없는 구제 불능이 바울 자신이라는 말이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도 했다. 자신의 약함을 아는 것, 구원은 거기서 시작되고 거기서 완성 된다. 마가요한의 다락방에는 실패한 예수제자들이 모여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성령주시기를 말이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직 기도만 했다. 성령을 받으니까 충만히 받으니까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는 교제를 하고 왕의 섬김으로 가난한 자가 없게 할 정도로 자기의 것을 내 놓아 서로를 세워주는 변화된 삶을 살았다. 첫째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겸손이다. 야고보서 4:10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하셨다. 우리교회는 성전건축의 축복을 받았다. 하지만 축복만은 아니다. 시험도 있다. 돈이 있으면 다 할 수 있다는 것의 시험 등이다. 기도해야 한다. 헌신도 해야 한다.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으면서 기도와 헌신으로 세우는 교회요 예배당이 되어야 할 것이다. 건물만 지어놓은 예배당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기도와 한신으로 세울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목사님을 새로 모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목사님을 모시는 것은 결혼하는 것과 같다. 이혼을 전제로 결혼하는 사람은 없다. 평생을 같이 사는 결혼이어야 한 듯이 교회도 목사님을 모실 때 평생을 함께 할 분을 모셔야 한다. 그러려면 기도해야 한다. 겸손하게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것이다. 교회60주년은 새로운 시작이다. 저는 전체 다해서 200평 조금 넘은 공간에서 목회를 했다. 이젠 공간도 넓어지고 완전 세로운 교회가 시작이 되는 것이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항상 부족하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힘으로 살게 해 달라는 믿음으로 큰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두 번째 겸손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며칠 동안 교회를 나오지 못한 분이 병으로 고생했다고 하면서 아픈 사람의 심정을 알겠다고 하신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라고 하신다. 마태복음20:28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하셨다. 섬기시는 것이 오신 이유라고 하신다. 그래서 대속물까지 되시는 것이다. 이처럼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것뿐 아니라 남의 아픔도 이해하고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에서 깊이 묵상하고 따라야 할 일이다. 반면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 이들의 뒤에 있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은 착취한다고 해서 강도라고 강도의 소굴이라 하셨다. 섬기지 않는 이들 거지 나사로의 부자처럼 불구덩이에 떨어질 것이다. 신앙인이라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 있고,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있고, 성령 받은 사람이 있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있다. 성령 충만해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성령의 열매 9가지는 다 섬김이다. 어제 인도네시아에 있는 김 상수선교사하고 전화를 했다. 우리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계셨는데 선교사의 비전을 이루셨다. 저보고 신학교에 오셔서 강의와 설교를 부탁하셨다. 인도네시아 교회의 형편을 물으니 대도시에는 큰 교회들이 있지만 지방 시골에는 어려운 교회들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20만원으로 시골에 교역자 한 분을 섬기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섬길 수 있는 분들을 놓고 기도했다. 버스에 타는 승객에게 반드시 인사를 하는 기사가 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나중에는 승객들도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기사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왜 그렇게 인사를 하느냐? 했더니 나로 인해서 각박한 세상 속에서 승객들이 조금이나마 온기를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란다. 이런 버스를 타고 싶다. 교회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참 아름답고 행복한 버스기사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이다. 겸손한 신자가 만들어 갈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귀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겸손하신 예수님과 성전에서 장사하는 교만한 장사꾼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냐? 인간의 힘으로 사느냐? 의 차이이다. 말씀을 보고 기도하고 헌신해야 한다. 내 안의 교만한 세상적인 마음들을 내 쫓아야 한다. 예수님의 겸손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의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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