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 2023년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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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남제일 작성일23-03-25 18:35 조회1,32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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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230407고난주간토요일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오늘은 가상칠언의 마지막으로..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기도이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이 말씀은 시편 31편 5절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신 말씀의 성취이다. 또한 이 기도는 본래 유대인들이 하루를 마치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스데반도 순교할 때 마지막으로 이 기도를 드렸다. 사도행전7:59,60에 “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했다. 스데반을 비롯한 여러 성도들에게도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기도를 볼 수 있다. 그 의미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아버지여”라는 말씀이다.
가상 칠언..여섯번째까지..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형벌을 받는 대속자의 관계였다. 구속역사를 완성하기 위한 공적인 관계요 사법적인 관계였다. “엘리 엘리”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하고 부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죄인들을 대신한 존재로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버지와 아들의 신분 관계로 돌아오셨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셨다. “아버지여.” 그 한마디 호칭 속에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우리 주님의 신뢰와 애정과 친밀함이 느껴진다. 무서운 율법의 저주를 다 받으시고, 끔찍한 지옥의 고통을 겪었지만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신뢰와 애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친밀함 역시 줄어들지 않았다. 어색함이나 서먹서먹함이나 망설임 없이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큰 소리로 “아버지여”하고 부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내 아버지도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대적하던 피조물을 양자로 삼아주셨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후사로 삼으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지옥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형제자매이다.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세계의 신학자는 유교적인 교회 직분에 있다고 했다. 직분은 사역인데도 권력으로 생각하는 잘못을 조심해야 한다. 내 직분이 높다고 생각되면 오히려 더 섬겨야 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평등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로..주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 살아야..진정한 그리스도인이고 교회가 되어..한 아버지를 모신 한 가족이라는 애정과 신뢰와 친밀감을 더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며 살기 위해 고난을 겪으셨다. 양자인 우리들 또한 이 땅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겪는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려 하면 수치와 모욕과 조롱을 당한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의 자녀는.. 고난이 나를 정금같이 연단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인가 보다 해석하며 인내해야 한다. 때로는 왜 내 삶에 이런 고통이 임했는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슬픔이 생겼는지 도무지 해석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상황에서도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를 중단하지 아니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와 친밀함을 유지하셨기에 저주의 형벌을 다 이겨내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는 것이 나의 힘이 된다. 찬양하고 감사하며 기뻐할 때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고난을 승화시킬 수 있다. 한 번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된 사람은 그 신분이 결코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는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게 하셨다(롬 5:6, 8, 10).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살자..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자..아버지의 사랑으로 맞이해 주실 것이다.
둘째, “내 영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임종 순간이 되면..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눈이 열린다고 한다.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이다. 구원받은 내 영혼이 아닌가? 어떤 이유든 영혼을 사단에게 팔아버린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고 비참한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사는 신자들은..거룩하게 하신 영혼의 문제는 뒷전에 밀쳐놓는 경우가 많다.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초등학교 학생들은..예쁜 스티커를 모으거나 닌텐도에 관심이 많다. 사춘기가 되면 외모와 이성에 대한 관심도 많아지고... 철이 들면서 좋은 대학과 좋은 직업과 좋은 배우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다. 결혼 후에는 좋은 차와 좋은 집에 관심이 많아지고, 자녀가 생기면 자녀 양육과 자녀의 성적표에 관심이 많아진다. 자녀가 자라면서 노년의 안락함에 대한 관심도 많아 진다. 그러한 모습들이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문제는 그러한 관심들이 ‘영혼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쉽게 매몰시켜버린다는 점이다.
영혼의 문제에..관심을 가지라..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복되게 사는 길이고 우리 역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한국의 교회가..영혼의 문제를 종교로 접근하려는 시도나..진리의 수호자보다는 행복의 안내자로 인식시키려 한다. 그 결과 종교 활동들이 개인 행복 추구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기독교는 세상 종교와 달리..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찾아오신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셨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마귀의 종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인도하셨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을 드릴 때에..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나에게 은혜를 달라고 하는 것이 먼저가 되면..다라고 하면.. 세상 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 잘못된 것이다. 사도바울은 먹든 지 마시든 지 무슨 일을 하든 지 하나님깨 영광을 돌리라고 했다. 우리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지금 어느 때 보다도 이단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길거리에 가면..신천지 젊은이들이..전도하는 것을 보면서..기겁을 했다. 이단들은 오히려 영혼구원이나 영생에 대하여..더 관심을 갖게 한다. 우리 교회들이 나의 행복을 찾고 은헤를 바라는 동안 미혹하는 이단들의 세력이 가라지처럼 무성하게 자랐다. 내 영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그래서 영혼이 사는 길을 선택하고 노력하지 않는 한 이 땅에서 이단들에 의해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한 젊은이들이 비틀거리며 이단들이 가르침에 빠진다. 아모스 선지자가 말했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암 8:11) 현상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영혼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노력해야 한다. 영혼에 대한 관심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우선권을 어디에 두었느냐의 문제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우리의 자녀들 가운데도 있을까 두렵다. 그들 역시 영혼의 문제를 뒷전으로 던져버리고 눈에 보이는 현실에 발맞추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관찰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 역시 미혹하는 이단 사상들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영혼의 구원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이 땅에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그분께서 지옥의 형벌을 감내하신 것을 생각하게 하지 않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땅의 교회가 ‘내 영혼’에 대한 관심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겠다. 적어도 교회에서 만큼은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환경들이 마련되어지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영혼의 안식처는 어디에 있으며, 언제 내 영혼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가? 아담과 하와는 이 땅에서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에 있어 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금도 부패하지 않은 완벽한 남성과 완벽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완벽하게 이상적인 커플이었다. 그 가정은 온전한 사랑이 있었으며 환경적으로도 최상의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그들이 여전히 에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은 사라졌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도 전에 그들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수치심이 자리 잡았다. 이를 보면 더 나은 환경과 더 좋은 인간 조건이 영혼의 안식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으면 에덴도 지옥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첫 번째 아담과는 달리 두 번째 아담이셨던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 정신적으로 온전한 만족이 있었던 에덴과는 달리 십자가는 온갖 인간들의 모욕과 멸시와 조롱이 쏟아지는 곳이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보살피심 대신에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있는 곳이었다. 육체적인 만족이 있는 에덴과는 달리 숨 한번 쉬기조차 힘든 곳이 십자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평안히 자신을 아버지 손에 맡기실 수 있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는 십자가라도 평안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의 손에 영원한 안식처가 있음을 보여 준다. 여러분은 생의 마지막..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날에 하나님 앞에 어떤 기도를 드리시겠나?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속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애정과 친밀함, 영혼의 안식과 참된 소망을 보게 된다. 우리의 마지막도 이와 같기를 바란다.“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지난 한 주간, 고난주간 기도회를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되어 참으로 감사하다. 갈급한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는 은혜가 충만하게 하실 것이다. 내일은 부활주일이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죽고 예수님의 부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님이 오실 때 성도들도 함께 세상을 심판하는 일에 동참할 것이다. 지금의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라.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아버지..그리고 내 영혼..두 가지를 생각하라!
4.7(금) "다 이루었다"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여섯 번째 ‘다 이루었다’, 헬라말로는 ‘테텔레스타이..’이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인가? 구원에의 승리이다. 사역을 마치기까지 이르도록 고통을 받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과 감격이 있다. 가상칠언은 첫째 마디부터 다섯째 마디까지..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어우르는 핵심을 제공했다. 이것은 죄인의 문제, 대속의 문제, 죽음의 문제, 삶의 문제 등 모든 방면의 문제들에 관련이 되어 있고, 다 이루었다는 마침표를 통해 그 문제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해소하여 종국적으로는 승리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다 이루었다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만 사용했다. 1) 주인이 노예 또는 하인에게 어떤 일을 맡겼을 때 그 일을 끝마친 노예와 하인들이 주인에게 ‘다 이루었다!’ 보고한다. 2) 제사의 제물로 바쳐진 짐승을 검사하는 제사장이 제물이 제사로 바쳐질 수 있는 흠 없는 제물이라고 판단될 때에 ‘다 이루었다!’ 라는 말을 한다. 3) 작가가 작품을 구상하고 그 작품을 완전히 마쳤을 때 작품 앞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한다. 4) 다른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린 채무자가 빌린 돈을 모두 갚은 후에 비로써 ‘다 이루었다!’ 라고 말했다. 이처럼 “다 이루었다”는 말이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된 언어이었기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자리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사용되었던 말씀을 중심으로 다 이루신 예수님의 사역을 보자.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라고 맡겨 주신 일을 십자가에서 마치셨다.
주인이 노예 또는 하인에게 어떤 일을 맡겼을 때 그 일을 끝마친 노예와 하인들이 주인에게 ‘다 이루었다!’ 라고 보고한다. 이 때에 "맡겨진 일을 완수했다"는 말이 바로 ‘ 테텔레스타이’였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사명을 맡겨주신 일을 성실하게 완수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일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구속의 임무를 죽음으로 완수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오셨다고도 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명을 다 하셨다는 것이 ‘다 이루었다’의 의미이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죄와 죽음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서 대신 다 해결해 주셨다. 이제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분이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이시며 내 삶의 완성자이다. 내가 영원토록 믿고 의지할 분이 예수님이다.
둘째,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대속의 제물이 되셨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먼저 시험해 보았다. 제사장은 그 제물이 눈이 멀거나, 다리를 절거나, 다른 흠이 없는지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나서 그 제물에 흠이 없으면 그는 그 제물에 대해 ‘테텔레스타이’‘완전하다’라고 선언했다. 예수님께서는 흠 없이 온전한 속죄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졌으며 친히 대 제사장이 되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제사를 드렸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제물이셨나?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셨다. 요한복음1:29에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천국백성으로..성령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되었다. 주님의 대속제물이 되셨음으로 구원받음을 믿자. 하박국 3:17,18에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요즈음같이 코로나로 경제적으로 몹시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오직 구원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믿음의 제물이 되라.
셋째, 예수님은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는 작품을 완성하셨다.
예술가들은 심혈을 기울여 한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그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할 때 “테텔레스타이” 라고 말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완벽한 구원이라는 작품이 탄생되는 순간이다. 구약 성경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에 대한 밑그림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이다. 오실 예수가 드디어 오셔서 이 구속의 사역을 완성했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구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작품이 완성되었어!”라고 외치시는 것이다.
예수님 고난의 과정은 모두가 구약에 예언된 약속의 성취과정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눅18:31절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구원자로서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다 이루어 생명을 얻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과 아픔과 치욕의 십자가에서만 이루어 낼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작품을 완성하신 것이다. 생명의 작품으로 완성된 그리스도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데살로니가전서 5:23,24에..“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흠없게 보전되라고 하신다. 주의 강림은 언제인가? 모른다. 우리 주님도 모르신다고 하셨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죽을 때 어떻게..어떤 모습으로 있을 것인가? 이다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까지 부르신 하나님, 미쁘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여..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보전되는 거룩한 삶의 작품을 만들기를 바란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의 빚은 그의 몸으로 단번에 갚으셨다.
죄의 값을 다 갚아 하나님을 만족시켰다는 뜻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었다. 하나님의 형벌을 감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죗값을 갚으셨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다. 고린도후서5:21 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죄 사함은 빚 탕감이다. 이사야선지자는 53:5에 빚 탕감을 위하여 주님이 하신 일을 말씀하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세상 죄를 청산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징계를 받아 평화와 나음을 주셨다고 하신다. 그의 몸으로 인류의 죄의 빚을 다 갚으신 것이다. 요한복음 5: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과거 현재 미래 모든 죄 값 이미 다 십자가에서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주님의 은혜로 거룩하게 되었다 새사람 되었다. 하나님 자녀다. 주님의 교회이고 주의 백성이다. 예수님께서 내 모든 죄의 빚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로 대신 다 갚으셨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요한일서 3: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다하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된 우리의 사명도 구원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베드로전서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구원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하여..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이 지역에 세워진 이유는 제사장이다. 우리나라에는 동네마다 서낭당이나 성황당 같은 영적인 지주들이 있다. 무당이 지역의 영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이런 장소나 무당을 찾아가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장나라가 되게 하신다고 했고 베드로 사도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영적으로 그 지역의 제사장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제사장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제사를 드린다. 우리 역시 우리 자신과 가정은 물론 일터와 지역의 구원을 위하여 예배하고 축복을 해야 한다. 우리도 완전한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는 기쁨과 감사가 있기를 바란다. 살기를 바란다.
4.6(목) "내가 목마르다!"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여러분은 무엇에 목마른가? 돈을 버는 일에..아니면 취미생활하는 것에..아니면 건강에..오늘 주님은 목마름의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셨다. 먼저는 구원의 성취..구원을 위해 사는 것이다. 다음은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의 목마름도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구원위해 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에 목마른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축복이 있다.
가상칠언 5번째 시간이다. “내가 목마르다!” 무슨 뜻인가? “내가 목마르다” 두 가지 이유이다.
첫째 ‘구원사역의 성취’이다.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루어 진 줄을 아시고..‘목마르다’” 라고 하셨다. 신학자 스트라우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 라고 호소하신 것은..십자가 상에서 온 세상의 모든 죄가 예수에게 지워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속죄의 사역이 이루어진 줄을 아셨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목 마르다’는 표현은 언제 하셨는가? 몸에서 나온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고통에 대한 표현으로만 목마르다 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을 다시 보라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루어 진 줄을 아시고 성경에 응하려 하사..” 모든 구원사역의 일이 이루어진 줄을 아시고..비로소 목마르다고 하신 것이다. 성경의 예언대로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대속하시기 위하여 심판대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목마르다’라고 한 것이다. 목마름은 고통의 표현이기도 하다.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몸으로써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신 것이다. 이로써..대속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알 수가 있다. 인간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오직 사랑만이..가능한 것이..내가 목마르다 의 의미이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4장에 수가성의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은 목마름의 다른 표현이다. 그녀는 여섯 남편을 두었지만..항상 목말라하고 있었다. 죄는 욕구를 해소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남편이 여섯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큰 목마름을 경험하게 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수가 성 여인에게 ‘물을 달라’목마름의 표현을 하신 것은 왜 일까? 여기에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다. 그래서 ‘내가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기 위해서’ 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어떤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하셨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이 주는 물은 우리에게 계속 갈증만 일으킨다. 예수님의 영생 수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시는 성령이 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목마른 수가 성 여인에게 영육 간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다. 그래서 여인은 물동이를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전도한다. “와서 보라!” 예수님을 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 예수가 구원이다. 모든 일을 이루셨다. 1) 죄를 대속하시고 2) 성령으로 부르시고 믿게 하시고 3)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게 하시고 4)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로마서 8:에서 말한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목마르다’는 고통의 표현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사랑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더 이상 목마르지 않고 영생수를 마시면서 살아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란다.
둘째,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이다.
“..예수께서..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ㄴ)내가 목마르다 하시니..”하셨다.
예수님은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의 길을 그대로 가셨다.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탄생부터 죽으심까지 말씀을 온전히 이루고 성취해 가는 삶, 바로 그것이다. 미가서 5:2절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이사야 7장의 예언처럼 동정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이사야 9:1-2절의 예언처럼 갈릴리를 중심으로 천국 복음을 증거하셨고, 스가랴 9:9절의 예언처럼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마침내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고난을 당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아시고, 그 말씀을 성취해 가는 삶을 사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29,30절에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하시는 것 역시..시편69:21의 예언 말씀을 응한 것이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하셨다. 이처럼 십자가 위에서 생명의 심지가 꺼져가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응하게 하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 성경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타는 목마름에도 불구하고 "식초와 같은 신 포도주를 삼키신 것"이었다. 그렇기에 주님은, “다 이루었다”는 한마디로, 주님의 생애를 정리하신 것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성경말씀을 일고 묵상하고 실천해 가는 것이다. 만약에 성경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면..망하는 것이다. 성경을 응하게 하기 위해 주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모범 보여주셨다. 제자 된 그리스도인에게 성경말씀대로 살려 고 하는 의지와 모습은 반드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이고, 참된 신자의 표식인 것이다. 그래야 예수처럼 사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마지막 생을 정리할 때 마땅히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 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이 되려면..나의 욕망이나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입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정하셔야 한다.
보셔야 할 것은..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되는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라..다른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의 하는 일을 보세요. 요한복음 19:24에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ㄱ)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는 시편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입니다. 36,37절에도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ㄷ)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ㄹ)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하는 것도 예언의 말씀이 응한 것입니다. 시편34: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스가랴12:10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이처럼 로마군인들이 행하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성경말씀이 응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특별히 구원에 관해서는 우리들이 힘써야 할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시:1에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쭟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며..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말씀대로 사는 것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 가는 거룩하고 성화된 모습을 갖게 된다. 이런 성화는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하나님의 말씀..성령으로 기록되었기에 성령하나님이 역사하신다. 말씀대로 사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축복이고 승리에의 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길을 따른다면..마땅히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설교의 핵심으로 여러분과 나누었다. 지난 세월 성경을 설교의 중심이었고 동시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설교하는 복음적 설교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우리 교회의 비전을 보세요. 지역사회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며 선교하는 예수 공동체이다. 지역사회는 한남동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와 땅끝까지 전하라고 하신 말씀처럼..지역사회는 학문적으로 보면 전 세계도 지역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타켓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으로 변화 시키며..”말씀 중심이다. 예수 중심이다. 교회를 찾아오는 분들이나..강의에 초청을 받아서 가면..대 부분이 묻는 것이 “한남제일교회는 지역을 위해 무슨 일을 하느냐?”이다. 아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복음의 능력이다. 말씀의 능력이고 예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복음은 지역사회는 물론 전도와 선교하는 일의 능력이 되고 비전이 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이 없으면..그 어느 것도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 된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보라. 모든 사역보다 앞서는 것은..사도행전 2:42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의 가르침은 설교이다. 은혜의 방편이다.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주신다. 그래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강단에 서서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두렵고 떨린다. 어떤 분은 설교를 한 시간하는 것은 하루의 노동력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젊어서는 힘든 것을 젊음으로 견디었지만..나이가 드니까 주일 저녁은 매우 힘들어서 잠을 못잔다. 그만큼 설교는 힘든 작업이다.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사도의 가르침인 설교를 듣고 난 후에 물건을 통용하고..가진 것을 나누었다고 했다.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것은..말씀의 은혜가 없이는 될 수가 없다.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성경 위주의 삶이다. 교회 와서 일만 하면 영적으로 텅 빈 교회와 성도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실족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누구 때문이라고 하지만..아니다. 구원을 이루고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면..단단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배는 무릎을 꿀는 것이다.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이다. 그러면 은헤를 주신다. 아이들도 달라고 달라고 하면 주지만..그러면 이쁘지 않다. 부모를 기쁘게 하는 자녀가 있다. “나의 엄마가 되어 주셔서 감사해요!”그 알아주는 한 마디에..부모는 기쁜 것이고 다 주고 싶다. 마찬가지로 찬양대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주일에 설교 말씀을 전문으로 나누어 주는 교회가 얼마나 되는가? 요약지는 있어도 설교 본문을 나누어 주는 교회는 거의 없다. 설교 말씀을 기록한 것을 나누어 드리는 것에 성경중심으로 살게 하려는 목회자의 생각을 잘 따르기를 바란다. 특히 기도할 때..주신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기도가 될 것이다. 바클레이라는 신학자는 기도에 대하여 정의하기를..기도는 나의 소원을 아뢰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러분의 기도가..영적으로 성숙해 지기를 바란다. 하나님 말씀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 성경은 구원의 책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4.5(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230405고난주간수요일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5-46)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모진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만한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말씀을 하셨다. 임종 단계에서의 고독감, 절망감을 나타내는 말로, 예수가 죽음의 극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나타낸다. 본 마디 직전에 온 땅에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한다. 유월 전야는 보름이기 때문에 이 어두움은 자연현상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이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가 어두움 가운데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이질적인 모습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절규한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그렇다 하나님이 예수를 버리셨다.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를 버리셨다는 분명한 의미이다. 왜 하나님이 예수를 버리셨을까? 단순히 버린 것이 아니다. 세상은 살인죄도 크지만 죽은 시체를 유기하고 버리는 것도 큰 벌로 다스린다. 그 뿐인가?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늙은 부모를 버리는 것도 죄이고 벌을 받는다. 쓰레기는 어떤가? 쓸모없는 것 같아도..분리수거를 통해 자원을 재 활용하는 것을 반긴다. 버리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물며..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다?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세상의 구원자이다. 세상마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구원자이신 예수가 버림을 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심판하셔야 하는데 그 죄들을 아들이 짊어지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이 예수를 버리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 버림받은 사람들은 다 죄인들이다. 가인의 후손들..노아 홍수 심판때 의 사람들 그리고 유황불의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마엘과 출애굽한 이스라엘 심지어는 예수의 제자인 유다, 가룟유다도 다 버림을 받았다. 택하심을 받았어도 중도에 타락하고 배반하는 죄인은 버림을 받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림을 받은 이유는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짊어지고 대속해야 했던 온 세상의 저주는 온 피조물이 조롱하고 하나님마저 외면하는 무게를 지니고 있고, 그 결과 우주 가운데에 홀로 선 극한의 고독과 아픔을 표출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버리셨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의 참혹한 심판으로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았던 것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나의 구원이 이런 심판의 고통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시53:5,6)하시는 말씀이..마음에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18-28에서 우리 인간의 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지심으로..로마서3:23,24에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죄를 대신 갚아주심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다고 천명하고 있다. 우리 안에는 예수 십자가의 상처가 있다. 의로운 자가 되었다. 감사하라! 또 감사하며 눈물을 흘려라!
두 번째, “크게 소리를 지르시니..”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크게 소리 지르는” 소리로 했다는 것은 선포이다. 못들은 사람이 없다. 다 들었다.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큰 소리로 하신 것이다. 만약에 고통의 표현 정도라면..신음소리 정도로 참을 것이지..이렇게 큰 소리로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있고 조롱하는 사람들까지도 있는데..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도 되지만 무엇보다도 마귀사탄에게 하시는 선포이다. 큰 소리는 마귀를 쫓아낼 때 사용되었다. 마가복음1:25,26에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5:7,8에는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마귀..너는 끝났다. 더 이상 우리는 마귀사탄의 영적 영향력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내지른 큰 소리는 절망의 소리가 아니라 사탄과 싸워 인류의 죄를 구속한 승리의 외침이다 .주님의 승리를 나도 선포하라.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라. 마귀를 대적하면 피한다고 하셨다. 야고보서4:7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마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큰 소리로 외치실 때 이미 끝났다. 예수는 고난 중에 승리를 눈앞에 두고 절규한 것이다. 여러분도 선포하라..죄는 없고 마귀는 물러 갈 지어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성령하나님으로 산다. 그렇다. 십자가에서 큰 소리는 절망의 소리가 아니라 사탄과 싸워 인류의 죄를 구속한 승리의 외침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죄의 영향력아래에서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버림받으심으로 여러분의 죄를 다 담당하셨다. 믿을 때, 이미 나의 죄는 없어졌다. 마귀도 떠나갔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마귀의 역사가 있다면 주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대적하라. 반드시 피한다. 오늘도 주님 붙잡고 승리하라.
4.4(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한남제일교회 오창우목사
230404 고난주간화요일“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어머니 마리아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십자가라는 모진 고통 속에서 어머니에 대하여 배려했다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 말씀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여자여!” 라는 호칭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머니에 대하여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셨다. 왜 예수님은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여 라고 부르셨을까?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성서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여자라는 호칭을..창세기 3:14-15과 연결을 시킨다. 나는 굉장히 일리가 있다고 본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들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하셨다. 하나님께서 사탄이 뱀에게 하신 저주의 말씀이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 죄를 짓게 한 뱀에게 하나님께서는 배로 다니고 흑을 먹고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신다. 뱀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실 것인데..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사탄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전통적으로 창세기3:14-15은 원시복음이라고 하여 예수님의 구원을 말씀한다고 한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은..발꿈치를 물린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말씀은..예수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골로새서2:15에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또 히브리서 2:14에도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하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한 것처럼..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대속의 피를 흘리기 위해..구원을 위해 여자의 후손으로 온 것이다. “여자여 아들이니이다.”여자와 아들은 여자의 후손임을 강조한 말씀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예수는..여자여 라고 했던 것이다.
둘째, “보라 네 어머니라!”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은..마리아에게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하시고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했다. 그 때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했다. 참으로 이상한 광경이다. 마리아에게는 이미 다른 자녀들이 있다. 마태복음13:55,56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예수의 동생은 여섯 명이다. 그 중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요 야고보서의 저자였을 정도로 마리아의 자녀들은 초대교회의 중진으로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맡겼을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탄생을 알리신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원으로..형제자매로 살았다. 성령 충만을 받은 교회 공동체는 세상이 부러워하는..세상과는 전혀 다른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 하늘천국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늘을 살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 왔다고 햇을 때..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냐?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들이 내 형제이고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셨다.(마12:50) 아담 이후로 가족은 혈연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혈연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의 전환을 주창하신 것이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이다. 안디옥교회를 보라! 이방인들의 교회 아닌가? 왕족과 노비가 함께..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가 함께..백인과 흑인이 함께..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남성과 여성이 함께..차별이 없다. 만민이 평등하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예수 공동체이기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웠다. 세상은 평등이 없기 때문에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다. 평등한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다. 연동교회는 양반이 자기 집의 노비가 교회로 왔을 때에..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형님 어서오십시오!”스스로 양반의 틀을 깨고 평등을 이루어낸 역사가 있기 때문에 지금도 총회장을 계속 나오고 교회자체가 평등함의 자존감으로 세워가는 것이다. 한국교회를 염려한 세계교회의 학자들은..유교적인 전통으로 인하여 직분이 사역이 아닌 신분으로 여겨지는 것을 가장 큰 문제로 보았다. 제가 한남제일교회를 사역하면서 이런 평등한 교회를 위한 노력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로석을 없애고 강대를 낮추고 강대의자를 내리고 교회 담장을 허는 등..낮아지고 섬김으로 평등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세상과 달리 서로 사랑하고 평등과 차별이 없는 신앙공동체라는 의미이다. 우리의 교회는 어떤가? 우리가 세워 갈 교회는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의 교회이다. 예수님이 만드신 새로운 신앙공동체..하나님 나라이다. 먹고 마시는 세상권력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우리를 죄인의 피로 맺어진 전통적인 가족 안에 가둬서는 안 된다. “보라 네 어머니라”“아들이다”하시는 이유는 우리는 주 안에서 한 가족임을 다시 한번 천명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단순 부모에게 효도만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마귀를 멸하시고 이 당에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교회, 교회공동체이다. 함께 이루어갈 그리스도 공동체..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가난한 자가 없는 예수 공동체..우리가 세워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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